있잖아, 다음에는 책방에서 만나자
김지선 지음 / 새벽감성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관계자'라는 말은 꽤나 근사한 말처럼 들린다. 우리가 어느 집 문패처럼 손쉽게 마주할 수 있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팻말에서 보듯 '관계자'는 언제나 남들이 드나들 수 없는 통제구역을 무시로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말하자면 보통의 일반인들과는 차별되는 어떤 특수한 권한을 부여받은 소수의 몇몇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자'는 사실 권한보다는 책임을 더 크게 떠안은 사람이라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근사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면서 우리가 무시로 드나들던 대부분의 공간들조차 이제는 몇몇 '관계자'들의 전유물로 변한 느낌이 든다. 그중 하나가 도서관이나 서점이 아닐까 싶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약속 시간까지는 한참의 여유가 있을 때에도 내 집인 양 주저 없이 들어가 빈 시간을 편하게 보내곤 하던 공간인데 이제는 '관계자'로부터 출입에 필요한 허가를 득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스러운 공간으로 변하고 말았다. 김지선 작가의 소설 <있잖아, 다음에는 책방에서 만나자>를 읽는 동안 나는 마치 몇십 년 전의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 느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책방지기가 되었고 어느 날 갑자기 곰인형이 내게 왔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책방에서 일했던 알바생의 이야기는 소설이 되었다. 소설 속 화자를 주인이 아닌 알바생으로 정한 것은 책방을 잘 모르는 사람의 입장으로 책방에서의 일 년을 그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해진 업무만 하면 되는 알바생의 입장으로 책방을 묘사하고 싶었다."  (p.194 '나·김지선' 중에서)


책방에서 근무하는 알바생의 시점으로 1월부터 12월까지의 소소한 일상을 마치 한 권의 에세이처럼 엮은 이 소설은 나처럼 둔한 독자에게는 어쩌면 에세이라고 해도 깜빡 속아 넘어갈 듯하다. 나도 그렇게 알고 읽었는데 뒷부분에 실린 '일 년이라는 인연'과 '일 년의 나에게'를 읽고 나서 그제야 비로소 이 책은 작가의 이야기를 알바생에게 투영하여 쓴 한 권의 소설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양천구의 어느 골목에 위치한 독립서점 '새벽감성1집'을 운영하고 있다는 작가는 여행작가로 지내다가 독립서점의 사장님이 된 케이스.


"인생을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처음 이곳에서 일을 시작했던 때는 내 삶에서 가장 힘들던 시기였다. 사라져 버리고 싶었지만 사라질 수 없었고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이면 나를 의지하는 가족들조차 무너져 버릴 것 같았기에 기를 쓰고 버텼다. 그러다 우연히 책방에 알바 자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적당히 외진 곳에 있고 적당히 숨을 수 있으며, 알바의 업무는 매출을 상승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장의 빈자리를 그저 메워주는 역할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p.35)


소설은 그렇게 특별할 것 같지 않은 책방 알바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일월, 이월, 삼월, 사월... 특별할 것도 없는 한 달 한 달의 소제목을 따라 책방 알바가 겪고 느끼는 특별한 일상과 생각들이 특별하지 않은 소제목 밑에 채워지는 것이다. 마치 우리의 삶이 돌이켜보면 특별하지 않은 이름 밑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한 경험들로 채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도래하지 않은 앞으로의 일 년을, 오 년을, 혹은 십 년을 걱정하곤 한다.


"사장은 이곳에서 십 년 동안 책방을 하고 싶다 했다. 그 말을 들으며 십 년을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중학교 때 오던 곳이 갑자기 생각나 고등학생이 된 지금 찾아왔다는 손님의 말에 뭉클한 감정이 들었다. 이 아이가 대학교에 간 후에 갑자기 생각나 찾아오거나 결혼하고 나서 갑자기 찾아왔는데 여전히 이곳에 책방이 있다면 어떨까?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인데 언제 와도 늘 그대로인 이곳이 남아 있다면 어떨까?"  (p.146 '시 월' 중에서)


사실 이 소설은 책방 알바의 경험을 다룬 책이라기보다 책방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한 사람이 겪는 특별한 인연에 관한 책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고 어느 시인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누군가를 만나 인연을 맺는다는 건 그 사람의 삶의 빗장을 열과 무시로 드나들 수 있는 관계를 득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모르던 누군가의 삶에 '관계자'가 되는 것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나 역시 누군가의 삶에 '관계자'가 되어 그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고 싶다. 여행을 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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