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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하스 의자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1월
평점 :
'적당한'이라는 말은 그 말이 갖는 의미의 모호성으로 인해 쓰는 이들이 부담을 느낀다. '적당한 거리', '적당한 온도', '적당한 애정' 등 쓰기에 따라서는 꽤나 근사한 글이 될 듯한데 우리는 '적당한'이라는 단어 앞에서 그만 숨이 콱 막히는 것이다. 얼마쯤 떨어져야 적당한 거리인지, 보일러의 온도를 얼마나 높여야 적당한 온도인지, 아이에게 얼마만큼의 애정을 쏟아야 적당한 애정인지 도통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이렇듯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모호한 의미의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나는 번번이 가벼운 절망을 느낀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데 말이다.
"나와 동생은 죽음은 평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죽음은 언젠가 우리를 맞으러 와 줄 베이비시터 같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신의 철모르는 갓난아기다." (p.45)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절망'이란 미래에 대한 어떠한 기대도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기대가 없는 상태에서의 하루하루는 무미건조하고 탁하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웨하스 의자>는 특별할 것 없는 어느 독신녀의 일상을 기록한다. 잠을 자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고, 산책을 하고, 때로는 섹스를 하고... 그렇다. 그것은 소설이랄 수도 없는 일종의 기록에 가깝다. 작가인 에쿠니 가오리는 한 여인의 일상을 충실하게 기록하는 속기사로서의 역할을 자청한다. 소설에서 서른여덟 살의 '나'는 몇 사람의 애인을 거쳐 지금의 애인을 만났고, 그는 골동품 가게와 헌책방을 하는, 딸과 아들을 하나씩 둔 유부남이다.
"내게 인생이란 운동장 같은 것이다. 입구도 출구도 없고, 물론 어딘가에 있을 테지만, 있어도 별 의미가 없다. 무질서하고, 전진도 후퇴도 없다. 모두들 그곳에서, 그저 운동을 할 뿐이다. 나는 그곳에서, 어쩔 줄 몰라한다." (p.77)
주인공인 '나'는 무의미한 현재의 일상 속에 과거의 기억을 더한다. 화가였던 어머니, 친절하지만 때론 엄했던 아버지, 동생과 나로 이루어진 한 가정으로부터 독립하여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동생과 나. 잡지사 기자 생활을 하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일찍 죽고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 그렇게 세 여인이 독립하여 각자의 삶을 살다가 4년 전 어머니마저 뇌출혈로 사망했다. 외부와의 교류가 적은 나의 집에는 택배 아저씨와 미술상, 내가 디자인한 스카프와 우산을 판매하는 부티크상, 길고양이와 7년째 만나고 있는 애인 등. 그런 환경에서 절망은 언제나 나와 가까웠다.
"나는 자살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지금은, 왜 자살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곤 한다. 복잡하게 얽혔다가 풀리는가 하면 어지러울 정도로 방 안 공기를 휘젓는 교향곡을 들으면서, 나는 자신이 아주 홀가분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죽음은 가벼움으로 나를 유혹한다." (p.118)
우리는 각자의 고독을 서로에게 털어놓지 않는다. 그것은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켜를 이루고, 마침내 어찌할 수 없는 더께로 엉겨 눌어붙으면, 서로의 틈은 고독의 더께만큼 멀어진다. 기대가 멀어질수록 우리의 삶이 허점투성이의 무엇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무한대의 자유가 주어지면 삶은 속절없이 가벼워진다는 걸 에쿠니 가오리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다른 누군가의 틀 안에 가두어지고 길들여질수록 안온함을 느끼게 마련이라는 걸 작가는 은연중에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절망이 기대하지 않는 삶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고독은 얽매이지 않는 삶에서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한낱 누군가의 삶을 간섭하고 내 뜻대로 다스리려는 욕망에 불과하지만 인간이란 그 틀 안에서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헌납하려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생명이 유한한 인간이 나의 기억을 타인에게 이식하려는 작은 몸부림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 중 사뭇 진지하고 읽기에 따라서는 철학적 질문이 가득한 이 소설은 겨울로 가는 어느 길목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잠시 사색할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