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가격표 - 각자 다른 생명의 값과 불공정성에 대하여
하워드 스티븐 프리드먼 지음, 연아람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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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금 254억을 부과받았던 모 그룹의 회장이 납부 대신 노역을 선택함으로써 일당 5억 원의 소위 '황제노역' 논란을 일으켰던 적이 있다. 하루 노동의 대가를 10만 원으로 정하는 일반인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싼 일당인 셈인데 2014년 4월 법이 개정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액 벌금을 단기의 노역장 유치로 무력화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했었다. 지금은 고액 벌금형 선고 시 환형유치기간의 하한을 정하는 조항이 신설되어 어느 정도 형평성을 맞추려는 노력이 개진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것도 노역장 유치 기간의 상한을 3년으로 정한 규정은 그대로 남아 있어 '황제노역'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우리는 이따금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할 때 "나처럼 고급 인력을 이렇게 부려먹어도 되나?" 하며 툴툴대기도 한다. 사람의 일당이 이처럼 천차만별인 것처럼 우리의 생명 역시 누군가에 의해 천차만별의 가격표가 매겨지고 이것이 사회 전반에 두루 이용된다는 것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이 얼마의 가격으로 매겨지는지 자세히 알고 있는 이도 드물지 싶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 가격표는 주변에서 끊임없이 매겨지고 있다. 혹자는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느냐며 항변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철학적 관점일 뿐 현실 세계에서 우리는 타인의 생명에 수시로 가격을 매기고 나 역시 타인에 의해 그리 평가된다는 것을 인지하여야만 한다. 지난 일이지만 군대 물품을 조달하는 대대 군수과에서 근무하였던 나는 갓 전입한 이등병 시기에 사망한 군인을 처리하는 영현 처리를 담당했던 적이 있다. 그때 일반 사병의 영현 처리비(일명 몸값)는 13만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 나와 선임들은 사람의 몸값이 갯값만도 못하다며 혀를 끌끌 찼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지만, 소중하다고 해서 가격이 매겨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명에는 매일같이, 끊임없이 가격표가 부여된다. 생명 가격표는 대개 불공정하다. 생명에 가격이 매겨질 때, 우리는 반드시 그 가격표가 공정하게 매겨지도록, 그래서 인권과 생명이 언제나 보호되도록 애써야 한다."  (p.277)

 

통계 전문가이자 보건경제학자인 하워드 스티븐 프리드먼이 쓴 <생명 가격표>는 '인간 생명의 가치 측정'이라는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현대 사회의 핵심 문제를 파고든다. 유엔인구기금에서 유엔 주요 사업의 수석 데이터모델러를 맡아 왔던 저자는 생명 가격표가 불공정할 때가 많고 젠더, 인종, 민족, 문화적 편견 등이 작용하며 노인보다는 젊은이, 빈자보다는 부자, 외국인보다는 내국인, 타인보다는 가족의 생명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결과로 이어지곤 하는 까닭에 낮은 가격이 매겨진 사람들은 제도적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노동시장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삶에서 돈과 시간이 어떻게 교환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노동에 대한 보상은 생명 가격표에 관한 논의에 매우 중요하다. 소득이 민사소송에서 생명에 책정되는 금전적 가치를 결정하는 데 핵심 요소로 작용하고, 9.11 희생자 보상 기금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p.137)

 

우리 사회에서 종종 불거지는 '위험의 외주화' 문제 역시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생명 가격표가 다라다는 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가격표가 낮게 책정된 사람들이 사회로부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채 더 큰 위험에 노출되고, 그것이 곧 다단계 하도급 구조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명 가격표의 최상단에 위치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환경에서 자신의 수명대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짐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구조는 삶을 영위하는 모든 환경에서 적용되며 이것을 피할 방법도 딱히 없다.

 

"관념적으로 생각해 보면 생명 가치 평가 방법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명백한 해답이 어딘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국의 철학자 아이제이아 벌린(Isaiah Berlin)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존재하지도 않는 불멸의 진리를 찾고자 하는 깊고 형이상학적인 불치의 욕구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는 상충하는 많은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가치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생명에 가치를 매기는 일에도 상충하는 많은 진리가 있다. 그리고 명확한 정답도 없다."  (p.265)

 

우리는 이따금 생명의 가치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치환하곤 한다. 최근 아동 성범죄를 저질러 12년을 복역한 뒤 출소한 조 모씨의 집에 잠입하여 조 씨를 피습했던 사건이 있었다. 그의 범행을 생각할 때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을 테고, 이미 법적 처벌을 받은 사람에게 사적 구제를 하는 건 잘못이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생명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한 인간 생명에 대한 가격표 역시 다양하게 평가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사람은 사람에게 간다/그러니까 사람이다'고 했던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우리의 생명에 다양한 가격표를 매기는 불합리한 행위를 시시각각 하는 주체 역시 사람이라는 사실이 가슴을 친다. 그러니까 사람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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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읽는 시간
이유진 지음 / 오티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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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평범한 일상에 마침표를 찍는 일이다. 당사자 본인에게는 그렇다. 그러나 삶을 이어가는 다른 모든 이에게는 타인의 죽음은 마치 일상에 찍힌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물론 죽음을 목도하는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일상을 뒤흔들 만큼의 태풍 그 이상의 충격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는 없는 죽음. 그러나 일상에서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그런 까닭에 죽음은 마치 영원한 침묵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끝나지 않는 지루한 소설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끝이 보이는 삶이라 해도 살아갈 가치가 없다거나 살아갈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다. 삶은 여전히 가치가 있고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누군가를 사랑해줄 수 있으며 남은 시간이 얼마든 관계없이 살아 있는 동안은 어떤 좋은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는 것이 정상이며, 이것이 좋은 죽음을 맞는 과정이다."  (p.322)


한국인 정신과 전문의인 저자가 미국에서 한국인 최초의 호스피스 완화의료 전문가가 된 후 많은 죽음을 지켜보면서 써내려간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죽음을 읽는 시간>은 '서른네 가지의 각기 다른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대부분은 어떻게 살고 죽을 것인가에 대해, 몇몇은 한국과 미국의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머지 조금은 저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미국의 호스피스 정신과 전문의로 13년간 활동헤오며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해온 저자가 삶에 대한 희망과 의욕을 잃은 현대인에게 내놓은 마음 처방전이자 사랑 충전제인 셈이다.


"꿈을 내려놓았지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려는 꿈을 품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보면 여전히 가슴이 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꿈꾸는 자가 월터에게 알려준 삶의 '본질'을 떠올려본다. 미래의 꿈을 좇는 삶도, 지금 여기를 사는 삶도 똑같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을. 행복은 내 안에 있고 나다움 속에 있다는 것을. 내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일, 그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이미 잘 살고 있다는 것을."  (p.73)


자신의 삶이 밋밋한 시간으로 채워지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나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마치 삶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듯 각자가 스릴 넘치는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오직 나만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그날이 그날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듯 여겨지기도 하고, 그런 모습은 내일도 혹은 일 년 후에도 달라지지 않을 것처럼 보여 의욕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다 보면 삶에서 가장 힘든 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인정하게 되는 날이 오고야 만다.


"내 곁에서 나와 시간을 함께해준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함께 보낸 시간을 기록하고 기억하며, 지금 내 곁에 있는 이들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그들과 함께할 앞으로의 시간에 끝이 있음을 알고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삶의 이유와 의미가 되어준다. 좋은 삶과 좋은 죽음을 위해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p.329)


나는 여전히 죽음을 가슴이 아닌 머리로만 이해하며 살고 있지만 언젠가 내게도 불청객처럼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바람이 있다면 그 소식을 듣고 거칠게 반항하거나, 미친 듯 부정하거나, 나약한 모습으로 방황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다정한 연인의 속삭임처럼 옅은 미소를 띠고 기쁘게 들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주 담담하게, 마치 이전에도 여러 번 들었던 사람처럼 노련하게 그 소식을 접했으면 좋겠다. 남겨진 사람들에게 가벼운 작별을 고하면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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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소박하게 - 문명을 거부한 어느 수행자의 일상
전충진 지음 / 나남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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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있던 시간도 지나고 나면 금세 아득해지곤 한다. 내가 직접 겪고 지나온 길이 아닌, 누군가로부터 그저 한 사람의 삶을 귀동냥으로 들었던 것처럼 허허롭고 마냥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삶을 치열하게 살아오지 못한 것도 원인이라면 원인이었을 터, 내 삶에 좀 더 애착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기도 한다. 이따금 시간이 날 때는 말이다. 그렇다고 무릎을 꿇고 앉아 긴 반성문을 쓰거나, 온종일 손을 들고 서 있거나, 벽을 보며 반성의 시간을 갖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전충진 작가의 에세이 <단순하게 소박하게>와 같은 부류의 책을 읽으며 한동안 멍 때리기를 하는 게 내 반성의 전부일뿐이다. 이 책 <단순하게 소박하게>는 기자 출신의 저자가 산중의 스님과 10년 넘게 교류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일상을 기록한 책이다.


"스님이 조그만 절이나마 주지 자리를 벗어버리고 일찌감치 농사를 짓고자 나선 것은 이처럼 <지게 철학>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다. 바로 스스로 먹거리를 해결하며,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살고자 한 것이다. 내가 소용하는 만큼의 농사를 짓고, 내가 수확한 만큼 그 안에서 만족하는 삶. 그로 인하여 마음은 번거롭지 않고 일상은 소박하게 꾸리는 것. 그 속에서 대大자유인의 모습을 찾는 것이다."  (p.64)


지게도인 육잠 스님이 터를 잡은 곳은 거창군 가북면 내촌리 덕동마을이다. 1317m 수도산 봉우리가 내리뻗은 능 선 한 자락을 뼈대 삼은 첩첩산중으로 전기는 당연히 없고, 이동전화도 잘 터지지 않는 오지 중의 오지이다. 스님은 그곳에 '두곡산방'이라는 삼간 집을 지은 후 낮에는 자급용 농사를 짓고, 밤에는 먹을 갈고 글씨를 쓴다. 산방과 해우소, 토굴까지 스님이 사는 마을 곳곳에는 절도, 절제, 운치, 여유가 스님을 따라 흐른다.


"붓에 의지하여 정진하는 스님에게 붓글씨 공부는 실존이자 실재이다. 살아 있음의 확인이자 구도인 것이기도 하다. '한나절 호미를 잡고 선정에 들고, 한나절 붓대에 의지해 삼매에 빠지는' 일상의 의미가 그렇다."  (p.200)


내가 육잠 스님을 처음 접한 것은 2020년 설 특집으로 방영된 EBS 〈한국기행〉 ‘그 겨울의 산사’ 편을 통해서였다. 사실 그곳은 스님이 처음 거처로 삼고 이 책의 무대가 된 경남 거창의 덕동마을이 아니었다. 몇 차례 집주인들이 손바꿈 하면서 덕동마을이 황폐화되고 숲과 사람이 공존하지 않는 곳으로 변해버리자 스님은 2012년 덕동마을을 떠나 경북 영양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곳에서도 스님은 벼루에 먹을 갈아 글을 쓰고, 스스로 길을 만들어 1km 남짓의 오체투지를 일상화하고, 자신이 세상을 떠났을 때를 대비하여 다비목을 준비하는 등 수행자로서, 그리고 세상에 빚을 지고 떠나고 싶지 않은 개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고독 속에 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인생을 말하며, 하물며 예술을 운운하겠는가. 스님은 깊은 산중에서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붓을 택했다. 이제는 그 붓을 고독의 친구로 유희하면서 산중 삶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p.334)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찰리 채플린은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고 했다. 말이나 글보다는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는 나의 삶을 부여잡고 살기보다 타인의 삶만 부러워하다 평생을 보내게 생겼다. 스님이 붓을 놓지 않는 이유도 자신의 삶을 다잡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놓지 않고, 순간순간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부쩍 추워진 날씨. 나를 벗어난 마음이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에 깃들고 있는가. 나는 언제나 내 마음을 품은 온전한 내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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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의 노트 - 식물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
신혜우 지음 / 김영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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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이라는 건 지각할 수 있는 인간이 단지 자신의 뇌기능만으로 지금 살고 있는 이곳으로부터 저곳으로 훌쩍 뛰어넘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육체의 이동이 없다고 해서 아무런 제약이나 장애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특정 분야에 대한 개인의 관심이나 지적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와 같은 장애나 제약을 없애고 우리로 하여금 전혀 다른 세계, 예컨대 식물의 세계나 동물의 세계, 바닷속 세계나 먼 우주에 이르기까지 관심은 있었지만 닿을 수 없었던 세계로 우리를 이끌었던 것은 전문가의 연구나 풍부한 설명, 말하자면 그들의 친절한 안내 덕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일반인의 호기심이나 지적 관심을 미지의 영역까지 확장하는 데는 전문가의 숨은 노력과 열정이 한몫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식물학자 신혜우의 에세이 <식물학자의 노트>에는 식물에 대한 전문가로서의 저자의 모습뿐만 아니라 식물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의 모습도 담겨 있습니다. 영국왕립원예협회 국제전시회 사상 처음으로 영국왕립원예협회 보태니컬 아트 국제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이 2013, 2014, 2018년 모두 금메달을 수상하였다는 저자의 그림은 놀라울 정도로 세밀한 것은 물론 그림 속에 그 식물에 대한 모든 것을 담아 놓았습니다. 식물의 생김새며, 꽃의 모양이며, 심지어 씨의 형태까지... 어쩌면 그것은 식물의 한살이를 그림 속에 모두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식물 그림은 그리는 식물 종에 대해 깊이 조사하고 전 생애를 관찰하여 최소 1년에 걸쳐 제작됩니다. 그릴 때는 문헌 조사와 오랜 관찰, 많은 표본을 살펴보는 길고 고된 과정이 있습니다. 관찰해야 하는 중요 부분을 놓치기라도 하면 다음 해를 기다려야 하기 일쑤이지요. 그런 고된 과정만큼 모든 내용이 집약된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면 더없이 뿌듯합니다."  (p.8 '프롤로그' 중에서)


책을 읽다 보면 식물의 한살이도 우리의 삶 못지않게 치열하고 힘겹다는 걸 알게 됩니다. 저자가 독자들에게 전하려 했던 바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종을 유지하기 위해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고, 자신의 DNA를 퍼뜨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며, 번식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모나 힘겨움도 감수할 수 있는... 식물에 대해 깊이 알면 알수록 인간의 폭력성과 나약함에 대해 깊이 반성하게도 되고, 그들의 한살이에 깊이 감동하게도 됩니다. 그리고 식물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 저자의 노력에 깊은 감사의 마음이 듭니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 우리는 떨어지는 낙엽을 마주합니다.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고, 올 한 해도 다 지나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식물에게 필요한 양분을 만들고 숨쉬게 하던 잎은 결국 떨어지지만,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새로운 잎을 키우는 또 다른 소임의 시작이죠. 도심에서는 떨어진 낙엽을 금세 치워버리지만, 자연에서 낙엽은 오래도록 나무뿌리 근처에 쌓여 서서히 썩어갑니다. 매서운 바람과 차가운 눈을 맞으며 낙엽은 거름이 되고, 나무를 다시 살게 하는 양분이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이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p.64~p.65)


총 5개의 챕터에 30여 종의 식물을 그림과 함께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말 못 하는 식물을 대신하는 저자가 그들의 세계로 안내하는 작은 안내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크기가 너무 작아 스스로 발아조차 할 수 없는 까닭에 곰팡이의 도움을 받아 싹을 틔우는 난초의 씨앗, 원래 살던 곳에서 떠나와 한국에 정착한 귀화식물들, 인간보다 한참 전에 출현하여 오랫동안 지구에서 잘 생존하여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고사리, 하나의 개체에서 세 가지 색의 꽃을 피워내는 산수국, 수정을 위해 벌의 페르몬과 같은 향을 내는 벌난초 등 저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식물의 세계를 멋들어지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의 세계는 자연선택의 결과이며, 늘 경쟁과 약육강식만 존재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의 세계에서 아름답게 여겨지는 이타심이 동물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식물의 세계에도 분명 존재합니다. 이는 어쩌면 진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일지도 모르죠. 이런 식물의 세계를 보며, 우리가 다른 이를 돕는 것은 자연의 진정한 섭리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p.235)


농경사회를 벗어난 현대인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빈번한 이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식물의 세계에서 강하다는 말은 힘이 세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처한 환경에 얼마나 잘 적응하는가를 뜻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좋든 싫든 여러 번의 이사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나 역시 새로운 환경에서의 적응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고향의 뒷동산에 올라 나물도 뜯고, 꼴도 베고, 땔감을 준비하기도 했던 나로서는 내 고향의 식생과 그곳의 냄새와 지형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지만 새롭게 정착한 곳은 모든 게 달랐습니다. 그렇게 이사의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적응 기간은 짧아질 수 있었지만 몸도 마음도 깊게 뿌리를 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최근에 '반려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까닭도 그런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잦은 이사로 주변의 환경이 늘 낯설기만 한 현대인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할 수 있는 반려식물로부터 받는 위로와 안정감은 무엇보다 각별할 테니까 말입니다. 2022년의 1월입니다. 우리는 또 낯선 한 해를 살아내야만 하고, 익숙했던 고향의 시간들을 그리워하겠지요. 좁은 베란다에서 수년째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애플민트의 푸른 생명력으로부터 나는 따뜻한 격려의 말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잘 될 거야. 잘 할 수 있어!" 하고 등을 토닥이는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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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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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고르는 기준은 독자마다 다르겠지만 그것은 대개 진리에 대한 탐구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접근, 혹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파악조차 불가능한 미지의 영역(예컨대 우주나 영혼 그리고 신과 같은)에 대한 상상이나 추측이 주가 되는 작품으로 요약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책을 읽는 재미나 지식의 습득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기준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러한 기준에서 보면 한강의 소설이 독자들에게 좋은 책으로 선정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우리의 영혼이 슬픔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한강의 소설을 통해 어렴풋이 깨닫곤 하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의 기원, 태곳적 영혼의 원형질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가도록 한다는 점에서 한강의 작품은 선택에 있어서 언제나 앞선 순위에 놓이게 된다. 우리들 각자의 몸 어딘가에 제 어미의 자궁 속 물의 무늬가 새겨지는 것처럼 우리네 영혼 어딘가엔 눈물의 흔적이 물결처럼 어려있다는 걸 생각하면 육체와 영혼이 결코 둘로 이분화될 수 없다는 걸 나는 한강의 소설을 통해 배우곤 한다.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 영혼의 기원에 대해 천착하는 듯 보이는 작가는 소재의 선택에 있어서도 비극과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한강의 소설은 개인의 삶에서 건져 올린 슬픈 사건이나 역사적 비극이 주요 테마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언제나 우리 육체의 기원인 물(水)이 등장한다. 그것이 비(雨)이거나, 눈(雪이거나), 바다(海)이거나, 강(江)이거나 그 본질은 언제나 물(水)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인간 영혼의 기원이 슬픔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우리가 흘리는 눈물 역시 육체의 기원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강 소설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단출한 구성에서 오는 인간의 절대 고독과 나약함이다. 관계의 단절에 놓인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하며 그 속에서 인간의 영혼은 어떻게 발현되는가 하는 문제는 작가가 닿고 싶은 궁극적 종착지였는지도 모른다.

 

소설은 주인공인 경하의 꿈으로부터 시작된다. 눈 내리는 벌판에 심겨진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가 마치 묘비처럼 서 있고, 묘지가 여기 있었나, 생각하는 순간 순식간에 물이 차오르고, 무덤들이 모두 바다에 쓸려가기 전에 뼈들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며 허둥대다가 어쩌지 못하는 채로 꿈에서 깬다. 경하는 그것이 자신이 지난 책에서 다룬 학살에 대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꿈과 연관된 작업을 영상을 만들 계획을 세워 함께 작업을 하려 했던 친구 인선을 떠올린다. 경하와 함께 사진과 다큐멘터리 영화 작업을 했던 인선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제주로 내려가 목공 일을 하고 있다. 경하는 인선에게 자신의 꿈과 연관된 작업을 영상으로 만들 계획을 알렸으나 몇 해 동안 힘든 시기를 겪으며 겨우 몸을 추스르는 사이 계획은 진척되지 못했고, 경하는 마음을 접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하는 병원에 있는 인선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는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척척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 밟아간다 해도 더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 (p.33)

 

통나무 작업을 하던 중 사고로 두 손가락이 절단되어 급히 통합수술을 받게 되었던 인선은 영문도 모른 채 달려온 경하에게 다짜고짜 한 가지 부탁을 떠넘긴다. 그날 안에 제주 집으로 가서 혼자 남은 자신의 새를 구해달라는 것. 경하는 인선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해 서둘러 제주로 향하지만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폭설과 강풍에 휩싸여 길을 잃고 헤맨다. 게다가 지병처럼 앓고 있는 두통이 찾아오는 바람에 경하는 죽음 직전의 위기에 빠진다.

 

시시각각 더 무거운 어둠에 잠기는 눈길에서 나는 그 바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적의 뒷면에 먹 자국처럼 배어 있는, 언제든 형상을 이루며 선명해질 수 있는 그림자 같은 그걸 걸음마다 느꼈다. 박명 속에 함박눈은 쉼없이 떨어져내렸고, 마침내 갈랫길이 나왔을 때에는 정말 어두워져 있었다. (p.130)

 

천신만고 끝에 인선의 집에 도착하였지만 경하는 새를 구하지는 못한다. 경하는 그곳에서 칠십 년 전 제주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과 인선의 슬픈 가족사를 듣게 된다. 가족 전체를 잃고 슬픔을 안은 채 십오 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아버지와, 부모와 동생을 한날한시에 잃고 오빠마저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채로 언니와 둘만 남아 남은 생을 살아내야 했던 어머니. 학살 이후 오빠의 행적을 찾는 일에 수십 년의 세월을 바쳤던 인선의 어머니 정심의 간절했던 마음이 무게도 없이 느리게 하강하는 눈송이처럼 독자들 마음에도 소리 없이 내려앉는다.

 

눈의 벽에 촛불이 감싸이자 사위가 더 어두워졌다. 내 눈앞에 어지고 있는 눈송이들이 거의 잿빛으로 보였다. 빛나는 것은 인선이 누운 곳으로 내리는 눈송이들뿐이었다. 코트 안에 껴입은 더플코트의 후드를 꺼내 쓰고 나도 눈 속에 누웠다. 두터운 눈의  격벽에서 스며 나온 빛이 음음하게 내 얼굴을 밝혔다. (p.319)

 

작가는 우리 삶에 스며드는 슬픔의 시간들, 과거에 존재했지만 드러나지 않은 슬픈 역사의 흔적들을 마치 눈송이처럼 독자들의 가슴에 녹아들게 한다. 인간 육체의 기원이 물이었던 것처럼 인간 영혼의 기원 역시 눈물, 그 슬픔의 역사였음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겨울밤, 길을 잃고 캄캄한 눈 속에 갇혔을지라도 우리 영혼의 발걸음이 슬픔의 강을 따라 다음 세대에 면면히 이어지는 한 우리는 결코 영원히 작별하지 않는 것이라고 작가는 외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흘린 눈물이 저 눈송이처럼 나의 눈에 가볍게 내려앉아 마음속 뜨거운 사랑을 일깨우는 한 우리는 결코 나약하거나 외롭지 않다는 걸 작가는 가만가만 말하려 했을 터, 내가 작가의 슬픔을 기억하는 한, 그리고 먼 미래에 나의 자리를 누군가 대신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작별하지 않는 것이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노래한 어느 시인의 노랫말처럼. 삶과 사랑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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