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학자의 노트 - 식물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
신혜우 지음 / 김영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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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이라는 건 지각할 수 있는 인간이 단지 자신의 뇌기능만으로 지금 살고 있는 이곳으로부터 저곳으로 훌쩍 뛰어넘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육체의 이동이 없다고 해서 아무런 제약이나 장애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특정 분야에 대한 개인의 관심이나 지적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와 같은 장애나 제약을 없애고 우리로 하여금 전혀 다른 세계, 예컨대 식물의 세계나 동물의 세계, 바닷속 세계나 먼 우주에 이르기까지 관심은 있었지만 닿을 수 없었던 세계로 우리를 이끌었던 것은 전문가의 연구나 풍부한 설명, 말하자면 그들의 친절한 안내 덕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일반인의 호기심이나 지적 관심을 미지의 영역까지 확장하는 데는 전문가의 숨은 노력과 열정이 한몫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식물학자 신혜우의 에세이 <식물학자의 노트>에는 식물에 대한 전문가로서의 저자의 모습뿐만 아니라 식물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의 모습도 담겨 있습니다. 영국왕립원예협회 국제전시회 사상 처음으로 영국왕립원예협회 보태니컬 아트 국제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이 2013, 2014, 2018년 모두 금메달을 수상하였다는 저자의 그림은 놀라울 정도로 세밀한 것은 물론 그림 속에 그 식물에 대한 모든 것을 담아 놓았습니다. 식물의 생김새며, 꽃의 모양이며, 심지어 씨의 형태까지... 어쩌면 그것은 식물의 한살이를 그림 속에 모두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식물 그림은 그리는 식물 종에 대해 깊이 조사하고 전 생애를 관찰하여 최소 1년에 걸쳐 제작됩니다. 그릴 때는 문헌 조사와 오랜 관찰, 많은 표본을 살펴보는 길고 고된 과정이 있습니다. 관찰해야 하는 중요 부분을 놓치기라도 하면 다음 해를 기다려야 하기 일쑤이지요. 그런 고된 과정만큼 모든 내용이 집약된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면 더없이 뿌듯합니다."  (p.8 '프롤로그' 중에서)


책을 읽다 보면 식물의 한살이도 우리의 삶 못지않게 치열하고 힘겹다는 걸 알게 됩니다. 저자가 독자들에게 전하려 했던 바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종을 유지하기 위해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고, 자신의 DNA를 퍼뜨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며, 번식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모나 힘겨움도 감수할 수 있는... 식물에 대해 깊이 알면 알수록 인간의 폭력성과 나약함에 대해 깊이 반성하게도 되고, 그들의 한살이에 깊이 감동하게도 됩니다. 그리고 식물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 저자의 노력에 깊은 감사의 마음이 듭니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 우리는 떨어지는 낙엽을 마주합니다.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고, 올 한 해도 다 지나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식물에게 필요한 양분을 만들고 숨쉬게 하던 잎은 결국 떨어지지만,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새로운 잎을 키우는 또 다른 소임의 시작이죠. 도심에서는 떨어진 낙엽을 금세 치워버리지만, 자연에서 낙엽은 오래도록 나무뿌리 근처에 쌓여 서서히 썩어갑니다. 매서운 바람과 차가운 눈을 맞으며 낙엽은 거름이 되고, 나무를 다시 살게 하는 양분이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이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p.64~p.65)


총 5개의 챕터에 30여 종의 식물을 그림과 함께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말 못 하는 식물을 대신하는 저자가 그들의 세계로 안내하는 작은 안내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크기가 너무 작아 스스로 발아조차 할 수 없는 까닭에 곰팡이의 도움을 받아 싹을 틔우는 난초의 씨앗, 원래 살던 곳에서 떠나와 한국에 정착한 귀화식물들, 인간보다 한참 전에 출현하여 오랫동안 지구에서 잘 생존하여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고사리, 하나의 개체에서 세 가지 색의 꽃을 피워내는 산수국, 수정을 위해 벌의 페르몬과 같은 향을 내는 벌난초 등 저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식물의 세계를 멋들어지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의 세계는 자연선택의 결과이며, 늘 경쟁과 약육강식만 존재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의 세계에서 아름답게 여겨지는 이타심이 동물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식물의 세계에도 분명 존재합니다. 이는 어쩌면 진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일지도 모르죠. 이런 식물의 세계를 보며, 우리가 다른 이를 돕는 것은 자연의 진정한 섭리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p.235)


농경사회를 벗어난 현대인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빈번한 이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식물의 세계에서 강하다는 말은 힘이 세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처한 환경에 얼마나 잘 적응하는가를 뜻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좋든 싫든 여러 번의 이사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나 역시 새로운 환경에서의 적응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고향의 뒷동산에 올라 나물도 뜯고, 꼴도 베고, 땔감을 준비하기도 했던 나로서는 내 고향의 식생과 그곳의 냄새와 지형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지만 새롭게 정착한 곳은 모든 게 달랐습니다. 그렇게 이사의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적응 기간은 짧아질 수 있었지만 몸도 마음도 깊게 뿌리를 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최근에 '반려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까닭도 그런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잦은 이사로 주변의 환경이 늘 낯설기만 한 현대인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할 수 있는 반려식물로부터 받는 위로와 안정감은 무엇보다 각별할 테니까 말입니다. 2022년의 1월입니다. 우리는 또 낯선 한 해를 살아내야만 하고, 익숙했던 고향의 시간들을 그리워하겠지요. 좁은 베란다에서 수년째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애플민트의 푸른 생명력으로부터 나는 따뜻한 격려의 말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잘 될 거야. 잘 할 수 있어!" 하고 등을 토닥이는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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