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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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고르는 기준은 독자마다 다르겠지만 그것은 대개 진리에 대한 탐구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접근, 혹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파악조차 불가능한 미지의 영역(예컨대 우주나 영혼 그리고 신과 같은)에 대한 상상이나 추측이 주가 되는 작품으로 요약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책을 읽는 재미나 지식의 습득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기준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러한 기준에서 보면 한강의 소설이 독자들에게 좋은 책으로 선정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우리의 영혼이 슬픔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한강의 소설을 통해 어렴풋이 깨닫곤 하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의 기원, 태곳적 영혼의 원형질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가도록 한다는 점에서 한강의 작품은 선택에 있어서 언제나 앞선 순위에 놓이게 된다. 우리들 각자의 몸 어딘가에 제 어미의 자궁 속 물의 무늬가 새겨지는 것처럼 우리네 영혼 어딘가엔 눈물의 흔적이 물결처럼 어려있다는 걸 생각하면 육체와 영혼이 결코 둘로 이분화될 수 없다는 걸 나는 한강의 소설을 통해 배우곤 한다.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 영혼의 기원에 대해 천착하는 듯 보이는 작가는 소재의 선택에 있어서도 비극과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한강의 소설은 개인의 삶에서 건져 올린 슬픈 사건이나 역사적 비극이 주요 테마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언제나 우리 육체의 기원인 물(水)이 등장한다. 그것이 비(雨)이거나, 눈(雪이거나), 바다(海)이거나, 강(江)이거나 그 본질은 언제나 물(水)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인간 영혼의 기원이 슬픔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우리가 흘리는 눈물 역시 육체의 기원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강 소설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단출한 구성에서 오는 인간의 절대 고독과 나약함이다. 관계의 단절에 놓인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하며 그 속에서 인간의 영혼은 어떻게 발현되는가 하는 문제는 작가가 닿고 싶은 궁극적 종착지였는지도 모른다.

 

소설은 주인공인 경하의 꿈으로부터 시작된다. 눈 내리는 벌판에 심겨진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가 마치 묘비처럼 서 있고, 묘지가 여기 있었나, 생각하는 순간 순식간에 물이 차오르고, 무덤들이 모두 바다에 쓸려가기 전에 뼈들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며 허둥대다가 어쩌지 못하는 채로 꿈에서 깬다. 경하는 그것이 자신이 지난 책에서 다룬 학살에 대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꿈과 연관된 작업을 영상을 만들 계획을 세워 함께 작업을 하려 했던 친구 인선을 떠올린다. 경하와 함께 사진과 다큐멘터리 영화 작업을 했던 인선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제주로 내려가 목공 일을 하고 있다. 경하는 인선에게 자신의 꿈과 연관된 작업을 영상으로 만들 계획을 알렸으나 몇 해 동안 힘든 시기를 겪으며 겨우 몸을 추스르는 사이 계획은 진척되지 못했고, 경하는 마음을 접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하는 병원에 있는 인선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는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척척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 밟아간다 해도 더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 (p.33)

 

통나무 작업을 하던 중 사고로 두 손가락이 절단되어 급히 통합수술을 받게 되었던 인선은 영문도 모른 채 달려온 경하에게 다짜고짜 한 가지 부탁을 떠넘긴다. 그날 안에 제주 집으로 가서 혼자 남은 자신의 새를 구해달라는 것. 경하는 인선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해 서둘러 제주로 향하지만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폭설과 강풍에 휩싸여 길을 잃고 헤맨다. 게다가 지병처럼 앓고 있는 두통이 찾아오는 바람에 경하는 죽음 직전의 위기에 빠진다.

 

시시각각 더 무거운 어둠에 잠기는 눈길에서 나는 그 바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적의 뒷면에 먹 자국처럼 배어 있는, 언제든 형상을 이루며 선명해질 수 있는 그림자 같은 그걸 걸음마다 느꼈다. 박명 속에 함박눈은 쉼없이 떨어져내렸고, 마침내 갈랫길이 나왔을 때에는 정말 어두워져 있었다. (p.130)

 

천신만고 끝에 인선의 집에 도착하였지만 경하는 새를 구하지는 못한다. 경하는 그곳에서 칠십 년 전 제주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과 인선의 슬픈 가족사를 듣게 된다. 가족 전체를 잃고 슬픔을 안은 채 십오 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아버지와, 부모와 동생을 한날한시에 잃고 오빠마저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채로 언니와 둘만 남아 남은 생을 살아내야 했던 어머니. 학살 이후 오빠의 행적을 찾는 일에 수십 년의 세월을 바쳤던 인선의 어머니 정심의 간절했던 마음이 무게도 없이 느리게 하강하는 눈송이처럼 독자들 마음에도 소리 없이 내려앉는다.

 

눈의 벽에 촛불이 감싸이자 사위가 더 어두워졌다. 내 눈앞에 어지고 있는 눈송이들이 거의 잿빛으로 보였다. 빛나는 것은 인선이 누운 곳으로 내리는 눈송이들뿐이었다. 코트 안에 껴입은 더플코트의 후드를 꺼내 쓰고 나도 눈 속에 누웠다. 두터운 눈의  격벽에서 스며 나온 빛이 음음하게 내 얼굴을 밝혔다. (p.319)

 

작가는 우리 삶에 스며드는 슬픔의 시간들, 과거에 존재했지만 드러나지 않은 슬픈 역사의 흔적들을 마치 눈송이처럼 독자들의 가슴에 녹아들게 한다. 인간 육체의 기원이 물이었던 것처럼 인간 영혼의 기원 역시 눈물, 그 슬픔의 역사였음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겨울밤, 길을 잃고 캄캄한 눈 속에 갇혔을지라도 우리 영혼의 발걸음이 슬픔의 강을 따라 다음 세대에 면면히 이어지는 한 우리는 결코 영원히 작별하지 않는 것이라고 작가는 외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흘린 눈물이 저 눈송이처럼 나의 눈에 가볍게 내려앉아 마음속 뜨거운 사랑을 일깨우는 한 우리는 결코 나약하거나 외롭지 않다는 걸 작가는 가만가만 말하려 했을 터, 내가 작가의 슬픔을 기억하는 한, 그리고 먼 미래에 나의 자리를 누군가 대신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작별하지 않는 것이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노래한 어느 시인의 노랫말처럼. 삶과 사랑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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