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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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산문집을 좋아한다. 콕 집어 좋아할 만한 뚜렷한 이유를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시인 특유의 섬세함과 글에 담긴 웅숭깊은 사유가 어쩌면 우둔한 나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시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나로서는 시보다는 산문집이 오히려 읽기에도 편하고 낯설지 않아서 좋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지나친 허세가 발동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시인이 아닌 일반 에세이스트의 글을 하찮게 여기거나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이걸 글이라고 썼나? 내용도 빈약하고 표현도 거칠고...' 하는 식의 박한 평을 늘어놓는 것이다. 물론 남들 들으라고 입 밖으로 내는 경우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책을 쓴 당사자는 허투루 한 나의 말에 몹시도 귀가 가렵지 않았을까.

 

"방법적 꿈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갖고 있지 않고, 따라서 기억도 상처도 못 이룰 희망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그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향기로운 사탕발림 속에서 내가 공상으로 절여두었던 맛있는 것들을 한 입씩 꺼내 먹는다. 그렇게, 과거를 가진 기억과 시간 밖에 존재하는 방법적 비몽사몽 사이에서 나의 정신은 진자운동을 거듭한다."  (p.21)

 

최승자 시인의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역시 제목에 섞인 '시인'이라는 두 글자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살아,/기다리는 것이다./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라고 썼던 시인의 시구와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는 몇몇 시구들이 마치 오래된 어느 궁궐의 조각난 기왓장처럼 내 기억의 발길에 차여 뒹굴 뿐 시인에 대한 존경이나 독자로서의 팬심이 나를 사로잡았던 건 아니다. 인연이란 그저 시간의 벌판에서 마주치는 하나의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나는 이 고독이라는 어휘와 그것이 뒤에 후광처럼 거느리고 있는 어떤  분위기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독을 연기해보고 싶었다. 아니 이런 말이 있을 수 있다면, 나는 고독을 실행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하여 내 유년기 최초의 고독 연습이 시작되었다."  (p.106)

 

거친 피부와 광대뼈가 불쑥 솟은 시인의 얼굴은 신산스러웠을 어떤 삶과 연결 지어지곤 한다. 그것이 꼭 시인 자신의 삶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런 얼굴이 갖는 이미지는 어쩌면 고독, 죽음, 우울, 가난, 지병 등 온갖 부정적인 단어들과 연결된 채 더 이상 근접할 수 없는 어떤 거리감을 유지하게 한다. 온갖 어두운 그늘이 얼굴 전체에 덕지덕지 붙은 누군가를 바라보면 볼수록 나 역시 질긴 삶의  악연에 손목을 낚아채일 것 같은 느낌. 시인에게선 그런 불길한 징후가 풍기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시인이 알고 있는 삶의 이면을 반드시 알아내야만 할 것 같은 어떤 책임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카발라가 유대 신비주의라면 수피즘은 이슬람 신비주의인데, 수피즘은 이론보다는 주로 시와 우화를 통해서 가르치지. 재미있는 것은 모든 신비 체계에는 죽음의 주제가 나오는데, 그건 바로 재탄생 혹은 부활의 주제라고 할 수 있지. 죽지 않으면 재탄생, 부활이 가능하지 않으니까. 그러네 그 경우 죽음이란 우리가 두려워 마지않는 물질적, 육체적 죽음의 극복을 뜻하고, 그건 달리 말하자면 죽음이란 없음을 깨닫는 것을 뜻하지. 육체적 죽음이 마지막 목적지로 정해져 있는 인생 프로그램에서 죽음이란 없음을 뜻하는 것, 즉 '죽음'의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모든 신비 체계의 클라이맥스이고, 연금술에서 말하는 현자의 돌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p.168~p.169)

 

시인은 에둘러 말하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신이 쓰는 산문집의 모든 글을 에둘러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시에서 잘 드러나지 않던 시인의 본모습은 산문에서 더 뚜렷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독자들에게 자신의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낸다는 건 시인에게도, 우리와 같은 장삼이사에게도 불편하고 꺼려지는 일임에 분명하다. 시인이 산문집의 출간을 꺼리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본업이 아니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독자들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감추고 싶은 시인의 속내를 끝내 들추어내고 만다. 시인의 기억 속에서 '기억의 병균들'을 끝도 없이 끌어올려 현재라는 도마 위에서 무참히 난도질하는 풍경은 차마 볼 수가 없다. 시인의 산문집을 사랑하는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죄책감을 느낀다.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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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차 방앗간의 편지
알퐁스 도데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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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나 우화처럼 담백하고 꾸밈이 없는 글을 쓴다는 건 오히려 어렵다. 더구나 길이에 제한이 있는 짧은 글을 통해 글쓴이의 의도를 독자들에게 정확히 전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쉽고 담백한 글을 쓰는 작가에 대한 독자의 찬사와 경탄은 찾아보기 어렵다. 찬사는 고사하고 무시와 조롱이 뒤따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쉽게 읽히는 글일수록 작가의 더 많은 피와 땀이 요구된다는 걸 독자들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뭔 뜻인지 이해도 되지 않는 현학적인 글을 천의무봉의 완벽한 글인 양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는지 나는 이따금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그랭구아르, 이건 자네와 나, 우리 둘만의 속내 이야기인데, 까만 털의 젊은 수컷 영양이 여복이 있었던지 블랑케트의 마음에 든 모양이야. 두 연인은 한두 시간 동안 숲에서 쏘다녔어. 녀석들이 무슨 말을 속삭였는지 알고 싶거든 이끼 밑에 숨어서 졸졸 흐르고 있는 수다쟁이 샘물에게 물어보게."  (p.45 '스갱 씨의 염소' 중에서)


알퐁스 도데의 단편 소설집 <풍차 방앗간의 편지>는 「레벤망」지와 「르피가로」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출판한 책으로, 책에 실린 단편 소설들은 대부분 알퐁스 도데의 고향인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을 배경으로 씌었다. 프로방스의 날씨, 풍경, 전설 등을 소재로 하여 작가 특유의 따뜻한 시선이 가미된 아름다운 작품은 읽는 이들의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의 소설은 동정심이 많은 인간성과 사물 및 개인의 신비에 대한 외경심도 포함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은 모파상이나 찰스 디킨스와도 유사점이 있다고 평가된다.


"나는 프로방스 농부들이 이야기할 때 곁들이는 멋진 지방 속담이나 대중적인 속담 혹은 격언 중에서 이보다 더 생생하고 독특한 속담은 들어보지 못했다. 나의 풍차 방앗간에서 60킬로미터 이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앙심을 품고 복수를 벼르고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할 때 이렇게 내뱉는다. "저 사람! 조심들 하게! 7년 동안이나 뒷발질을 벼르고 별렀던 교황의 노새 같은 사람이니까!" 나는 도대체 이 속담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교황의 노새가 어떤 것이며, 또 7년 동안이나 참았다는 뒷발질이 무슨 뜻인지 알아내려고 꽤 오랫동안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며 수소문했다."  (p.68 '교황의 노새' 중에서)


작품 중에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시골의 풍경이 변하게 되고 농경사회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며 지켜오던 전통이나 풍습이 파괴되고 급기야 농촌사회가 무너지기 시작한 지중해 연안 지방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작품도 있다. 이는 증기 제분 공장이 들어서면서 일거리를 잃게 된 방앗간 주인의 이야기로 대표된다. 뿐만 아니라 <메뚜기 떼>처럼 작가의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사실에 기반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세관원>, <황금 두뇌를 가진 사내의 전설> 등 비극적인 내용의 작품도 있다.


"경제적 고통과 오랜 지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을 끈기 있게 극복해 가면서 창작 생활에 온 힘을 기울인 도대의 모든 작품에는 소외된 인간들에 대한 따뜻한 인간애, 현실에 대한 씁쓸하고도 냉정한 인식, 당시 프랑스 사회에 대한 예리한 풍속 묘사 등 생생한 감동이 녹아 있다."  (p.292 '역자 후기' 중에서)


알퐁스 도데의 작품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평생 종지기로 살면서 아름다운 동화를 남긴 아동 문학가 권정생 선생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지병과 가난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맑은 눈을 잃지 않았기에 도데의 작품 속에서도, 권정생 작가의 작품 속에서도 순수함에 깃든 푸른 감동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평생을 고위 공직자로 살면서 단 한 번도 가난한 자의 편에 서지 않았던 자가 표를 위해서라면 서민의 대변자인 양 잘도 꾸며대는 작금의 세상에서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성 회복, 바로 그것이 아닐까. 알퐁스 도데의 <풍차 방앗간의 편지>를 읽는다는 건 누군가를 향해 보복의 정치를 꿈꾸는 이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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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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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의 밑바탕에는 말할 수 없이 깊은 공허가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종종 간과하곤 한다. 이를테면 저따위를 해서 뭘 하나? 하는 심리는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행동을 가로막고 종국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한다. 무기력은 아마도 벗어나기 힘든 늪이나 수렁과 같아서 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벗어나기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기력의 늪에 빠진 누군가를 구조할 때 우리들 대부분은 그저 늪의 주변만 빙빙 맴돌면서 왜 빠져나오지 않느냐는 타박만 늘어놓을 뿐 묵묵히 도움의 손길을 내밀거나 최선을 다해 구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이는 찾기 어렵다.

 

"나는 쾌감이 전혀 없지도 않은 채 그냥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하여 결국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무엇이나 다 어디엔가로 인도하게 마련이다. 오직 그것에만 아무런 출구가 없었다. 설사 그 상태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삶 자체가 어찌나 죽음과 흡사한 것이었는지 그 차이를 분간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동물도 죽을 때는 본능적으로 경련하는 법이라지만."  (p.30)

 

알베르 카뮈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장 그르니에의 수필집 『섬』은 일반 독자들보다는 작가들에게 더 인기가 있는 책일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추론은 대개 작가들의 추천 도서 목록에 오르는 횟수에서 기인한다. 말하자면 일반 독자들이 『섬』에 대해 자신의 블로그에서 리뷰를 쓰거나 『섬』을 자신이 추천하는 도서로 지인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장 그리니에의 『섬』이 갖는 특성, 이를테면 작가의 깊은 사색과 정제된 문장에서 오는 생각할 거리가 일반 독자들보다는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작가들에게 훨씬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언제나 똑같은 내용이긴 하지요. 그렇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할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 이외에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마음속에서 모든 순간들과 모든 존재들을 하나로 합쳐주는 것입니다."  (p.64)

 

프랑스 알제 대학교의 철학교수를 지내면서 많은 명상적인 에세이를 남겼던 장 그르니에. 『섬』이 세계적인 문호 알베르 카뮈에게 영감을 주고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처럼 다른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고 앞으로도 꾸준히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책을 읽어오며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결론이라는 게 사실 어떤 객관적 근거에 기반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나의 추측에 불과한 것이지만 말이다. 결론인 즉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 『섬』에 실린 글의 대부분이 특정한 목적을 갖고 쓰지 않았던 것은 물론 오랜 시간을 두고 쓰고 또 고치면서 각고의 노력으로 완성한 게 아니라 글의 윤곽이 떠오른 어느 날 단숨에 써내려갔을 것이라는 추측, 바로 그것이었다. 누군가에게 큰 감동을 주는 글은 하루에 한두 문장씩 긴 시간의 사투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진 사색의 결과를 일필휘지로 단숨에 써내려가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저 형언할 길 없는 과거의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나는 나를 에워싸고 있는 맹목적이고 엄청난 힘들로부터 헤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인식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무(無)에 대한 섬뜩함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정신적인 생활을 하게 된 셈이지만 그것은 실상은 거꾸로 된 정신적 생활이었다. 저 성벽처럼 쌓인 책들 속에는 얼마나 대단한 매혹이 깃들여 있었던가! 그러나 도서관 밖을 나설 때면 머리가 아팠고 마음은 더욱 메말라가는 듯 느껴졌다."  (p.120~p.121)

 

고백하자면 나 역시 사색의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 중 한 명인 까닭에 200쪽도 되지 않는 이 책을 그저 눈으로만 서너 차례 읽었을 뿐 가슴으로 읽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책에 대한 느낌이나 어설픈 리뷰를 써보자 결심했던 것도 최근의 일이고 보니 책에서 장 그르니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더더욱 아니어서 리뷰를 쓰면서도 핵심에는 접근하지 못한 채 그저 겉도는 이야기만 쓸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관찰하는 대상을 멀찌기서 바라볼 뿐 자신만의 잣대로 판단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들지 않는 점은 그르니에로부터 배웠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그것이 내가 여전히 미숙한 독자임을 밝히는 꼴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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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걷는 여자들 -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
로런 엘킨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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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향은 눅진하게 퍼지듯 다가오지 않고, 가고자 하는 대상을 향해 찌르듯 덮쳐온다. 그러므로 솔향을 맡는 이는 누구나 고즈넉함에 기대어 소나무와 대화할 준비가 되었음을, 조용히 마음으로 다가갈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마음의 문을 열기 전에 우리는 서로의 내음을 먼저 맡았던 게 아닐까. 그렇게 조용조용 서로를 탐구하며 가까워졌던 게 아닐까. 그러므로 냄새는, 아니 향기는 마음보다 먼저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전조처럼. 혹은 징후처럼.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해 객관적일 수가 없어서 카드에 의존한다. 그래서 점을 치는 게임이나 수맥 찾는 막대기 같은 것을 좋아한다. 길을 찾아줘. 금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려줘. 나도 전에 영화에서 본 방법을 써본 적이 있다. 책 한 권을 집어 아무 쪽이나 펼친 다음(『오만과 편견』이 내가 가장 많이 쓴 책이다. 엘리자베스 베넷의 분별력에 도움을 받기를 기대하면서.) 손으로 짚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단어를 예언이나 지침으로 삼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책점'이라고 하는데 오래된 점술법이다."  (p.356)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는 독특한 여행기이자 도시를 빈둥거리며 구경하는 플라뇌즈로서의 도시 비평서이기도 하다. 엘킨의 여행은 우리를 파리, 런던, 도쿄 등의 풍경 속으로 데려갈 뿐만 아니라, 직접 마주하는 것보다도 더 생생하게 이 도시들의 속살을 보여준다. 작가는 책에서 때로는 관광객이었다가, 또 때로는 동네 주민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이민자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독자들에게 무척이나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엘킨의 숨김없고 솔직한 글쓰기가 빛을 발하는 것도 이처럼 낯선 느낌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젊은 여자가 호텔 방에 있다. 낯선 도시에서 보내는 첫날밤이다. 그러니까 바로 그 도시, 뉴욕에서. 빙하 위의 동굴에 비할 만큼 에어컨이 세게 나오는 방에서 담요를 둘둘 말고 있다. 기침이 나고 열이 오르는 것 같지만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에어컨을 꺼달라고 부탁할 용기가 없다. 누군가가 올라오면 팁을 얼마나 줘야 할까? 팁도 없이 돌려보내거나 아니면 너무 많이 줘서 호구로 보이느니 차라리 추운 게 나을 것 같다."  (p.395)


책을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단연코 선택 1순위에 올려놓을 듯한 이 책은 사실 하나의 장점이 더 있다. 4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책의 두께가 그것이다. 책에 빠져들 만하면 금세 책이 끝나버리는 불합리한 책의 두께가 늘 불만이었다면 이 책은 그런 것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주목한 여성 산책자들은 조르주 상드, 버지니아 울프, 소피 칼, 아녜스 바르다 등'걷기와 사색을 통해 자기가 관찰한 삶에 질문을 던지고 도전하고 새로 만들어낸' 예술가들이라고 극찬하며 그들의 작품을 작가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읽어낸다.


"울프는 거리에서 이야기를 캐냈고 자기가 관찰한 사람들, 걷고 물건을 사고 일하고 멈추어 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책을 채웠다. 특히 여자들. 기차에서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묘사하면서 울프는 이렇게 선언했다. "모든 소설은 반대편 구석의 늙은 여자로부터 시작한다." 아니면 상점의 젊은 여자. "나는 나폴레옹의 150번째 전기나, Z교수가 심혈을 기울이는 키츠가 밀튼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한 70번째 연구보다는, 그 여자의 진짜 삶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p.129)


2022년의 설 명절은 가만가만한 냄새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분주함 속에 내재된 불안이라고 해야 할까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19의 위협과 그 위협을 더는 용납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반감이 만들어낸 거친 시간이었다. 사랑한다는 건 그와 같이 치솟는 감정을 가만가만 누르며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을 묵묵히 인정하는 침묵의 울음이 아니었을까. 다만 이리저리 공간만 바삐 달라졌을 뿐 '언제'라는 시간에서 다시 또 '언제'라는 시간으로 되돌아온 나는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을 읽었고, 잔설이 남은 아파트 화단을 먼 시선으로 보고 있다. 멀리서 다가오는 솔향. 뭔가 대화를 시작하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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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어 - 되는 일이 없을 때 읽으면 용기가 되는 이야기
하주현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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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읽는 자기계발서의 대부분이 성공담이나 성공 노하우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나 아니다.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그렇다. 오히려 저자 자신의 실패담이나 실패로부터 깨우친 것을 책으로 엮었을 때, 책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더 쉽게 움직일 수 있다. 그것은 소설을 비롯한 대부분의 문학 장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쁨보다는 슬픔, 해피엔딩보다는 새드엔딩, 성공보다는 실패의 이야기가 독자들의 마음에 더 깊은 여운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의 기저에는 우리 삶의 근본 원리와도 깊은 연관이 있는 듯 보인다.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의 삶은 실패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 혹은 인간적 성숙을 이룬 영웅담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조차도 실패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 그 모든 것들이 따지고 보면 실패담이다. 한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다른 분야를 포기함으로써 얻어진 결과인 까닭에 다른 여러 분야의 측면에서는 역시 실패담일 수밖에 없다. 다만 본인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가 성공한 분야 이외의 다른 분야에 눈길을 돌리지 않는 까닭에 성공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이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기준은 자신의 삶을 다른 어떤 것과 견주어 비교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자신의 삶에 무리한 욕심을 낸 까닭에 이 분야에 조금, 저 분야에 또 조금의 시간을 허비했다면 그것은 실패담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다른 이의 삶을 기웃대지만 않는다면 우리 모두의 삶은 성공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쉽게 말하는 '할 수 없는 이유들'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유들'로 바꾸어 가는 얘기를 전하고 싶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는 마음을 가졌으면 하니까. 언젠가 희망 없이 털썩 주저앉아 있을 때 내 이야기를 떠올리며 의지와 희망으로 툭툭 털고 일어난다면 이 책은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p.19 '프롤로그' 중에서)


<아무나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어>를 쓴 하주현 역시 다른 이의 삶을 기웃대거나 자신이 선택한 삶을 후회하지 않은 채 오직 외길을 향해 달려온 케이스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녀의 삶을 성공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스스로는 극구 부정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혹은 저자 스스로가 다른 분야로 눈길을 돌리는 순간 그녀의 삶은 순식간에 실패담이 되고 만다. 다른 분야에서 특별한 성취를 이룬 사람은 수를 셀 수도 없이 많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하는 비교의 기준(예컨대 재산이나 명성, 권력 등)으로 보더라도 그녀의 삶은 특별할 게 없기 때문이다.


"아파트에는 쥐도 많았다. 그것도 슈퍼 사이즈의 쥐! 이곳 바퀴벌레와 쥐는 모두 슈퍼 사이즈였다. 새벽에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일어나면 쥐가 돌아다니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보다 더 당당해서 오히려 쥐가 사는 집에 내가 얹혀사는 기분이었다. <섹스 앤 더 시티>에서 그리는 밝은 뉴욕의 뒤에는 늘 어둠이 깔려 있었다."  (p.129)


저자의 이력을 보면 화려하기 그지없다. 코넬 대학교에서 호텔과 레스토랑 경영학 석사를 졸업하고 포시즌스 호텔 뉴욕, 리츠칼튼 호텔 서울, 미국 플로리다, 펜타곤 시티, 호주 시드니와 미슐랭 3스타 쉐프들의 레스토랑 뉴욕 다니엘, 르 버나딘, 라틀리에 드 조엘 로부숑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뿐만 아니라 2013년 한국으로 돌아와 프랑스 식료품 브랜드 포숑의 한국 디렉터, 2015년 신세계 그룹 신세계 푸드 외식 팀 영업팀장과 레스케이프 호텔 식음 팀장을 거쳤다고 하니 그녀를 모르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녀의 출신 배경이 '금수저'려니 착각할 수도 있겠다.


"나는 국내외 대기업과 중소기업, 개인 기업을 아우르며 말단 직원에서부터 임원, 그리고 조그만 베이커리의 오너까지 차근차근 성장했다. 다양한 위치와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경험이 쌓였다. 누구나 그렇듯 나에게 다시 지나간 시간이 주어진다면 좀 더 잘 준비해서 더 잘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하지만 내 인생을 뒤로 되돌릴 순 없다. 대신 후배들이 지나간 나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들의 방식대로 젊음과 열정적인 삶을 잘 써내려 가길 바란다. 이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p.226 '에필로그' 중에서)


저자 하주현이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며 기적처럼 일구어낸 작은 성취들을 기록한 이 책, <아무나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어>는 자기계발서라기엔 다분히 문학적이며 가독력이 높고, 삶에 지친 이들에게 큰 용기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선 수준 높은 자기계발서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나는 저자의 삶 역시 누구나가 넘볼 수 있는 평범한 분야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결코 저자의 성취를 폄훼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노력이나 열정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섞인 것도 아니다. 다만 각자의 삶이 이룩한 성취가 어떻든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다른 분야를 기웃대지만 않는다면 그러한 삶을 사는 모든 이의 삶이 성공담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저자 하주현의 삶이 성공담이듯 나와 우리 모두의 삶이 성공담으로 평가될 수 있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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