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걷는 여자들 -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
로런 엘킨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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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향은 눅진하게 퍼지듯 다가오지 않고, 가고자 하는 대상을 향해 찌르듯 덮쳐온다. 그러므로 솔향을 맡는 이는 누구나 고즈넉함에 기대어 소나무와 대화할 준비가 되었음을, 조용히 마음으로 다가갈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마음의 문을 열기 전에 우리는 서로의 내음을 먼저 맡았던 게 아닐까. 그렇게 조용조용 서로를 탐구하며 가까워졌던 게 아닐까. 그러므로 냄새는, 아니 향기는 마음보다 먼저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전조처럼. 혹은 징후처럼.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해 객관적일 수가 없어서 카드에 의존한다. 그래서 점을 치는 게임이나 수맥 찾는 막대기 같은 것을 좋아한다. 길을 찾아줘. 금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려줘. 나도 전에 영화에서 본 방법을 써본 적이 있다. 책 한 권을 집어 아무 쪽이나 펼친 다음(『오만과 편견』이 내가 가장 많이 쓴 책이다. 엘리자베스 베넷의 분별력에 도움을 받기를 기대하면서.) 손으로 짚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단어를 예언이나 지침으로 삼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책점'이라고 하는데 오래된 점술법이다."  (p.356)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는 독특한 여행기이자 도시를 빈둥거리며 구경하는 플라뇌즈로서의 도시 비평서이기도 하다. 엘킨의 여행은 우리를 파리, 런던, 도쿄 등의 풍경 속으로 데려갈 뿐만 아니라, 직접 마주하는 것보다도 더 생생하게 이 도시들의 속살을 보여준다. 작가는 책에서 때로는 관광객이었다가, 또 때로는 동네 주민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이민자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독자들에게 무척이나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엘킨의 숨김없고 솔직한 글쓰기가 빛을 발하는 것도 이처럼 낯선 느낌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젊은 여자가 호텔 방에 있다. 낯선 도시에서 보내는 첫날밤이다. 그러니까 바로 그 도시, 뉴욕에서. 빙하 위의 동굴에 비할 만큼 에어컨이 세게 나오는 방에서 담요를 둘둘 말고 있다. 기침이 나고 열이 오르는 것 같지만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에어컨을 꺼달라고 부탁할 용기가 없다. 누군가가 올라오면 팁을 얼마나 줘야 할까? 팁도 없이 돌려보내거나 아니면 너무 많이 줘서 호구로 보이느니 차라리 추운 게 나을 것 같다."  (p.395)


책을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단연코 선택 1순위에 올려놓을 듯한 이 책은 사실 하나의 장점이 더 있다. 4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책의 두께가 그것이다. 책에 빠져들 만하면 금세 책이 끝나버리는 불합리한 책의 두께가 늘 불만이었다면 이 책은 그런 것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주목한 여성 산책자들은 조르주 상드, 버지니아 울프, 소피 칼, 아녜스 바르다 등'걷기와 사색을 통해 자기가 관찰한 삶에 질문을 던지고 도전하고 새로 만들어낸' 예술가들이라고 극찬하며 그들의 작품을 작가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읽어낸다.


"울프는 거리에서 이야기를 캐냈고 자기가 관찰한 사람들, 걷고 물건을 사고 일하고 멈추어 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책을 채웠다. 특히 여자들. 기차에서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묘사하면서 울프는 이렇게 선언했다. "모든 소설은 반대편 구석의 늙은 여자로부터 시작한다." 아니면 상점의 젊은 여자. "나는 나폴레옹의 150번째 전기나, Z교수가 심혈을 기울이는 키츠가 밀튼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한 70번째 연구보다는, 그 여자의 진짜 삶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p.129)


2022년의 설 명절은 가만가만한 냄새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분주함 속에 내재된 불안이라고 해야 할까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19의 위협과 그 위협을 더는 용납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반감이 만들어낸 거친 시간이었다. 사랑한다는 건 그와 같이 치솟는 감정을 가만가만 누르며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을 묵묵히 인정하는 침묵의 울음이 아니었을까. 다만 이리저리 공간만 바삐 달라졌을 뿐 '언제'라는 시간에서 다시 또 '언제'라는 시간으로 되돌아온 나는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을 읽었고, 잔설이 남은 아파트 화단을 먼 시선으로 보고 있다. 멀리서 다가오는 솔향. 뭔가 대화를 시작하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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