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차 방앗간의 편지
알퐁스 도데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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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나 우화처럼 담백하고 꾸밈이 없는 글을 쓴다는 건 오히려 어렵다. 더구나 길이에 제한이 있는 짧은 글을 통해 글쓴이의 의도를 독자들에게 정확히 전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쉽고 담백한 글을 쓰는 작가에 대한 독자의 찬사와 경탄은 찾아보기 어렵다. 찬사는 고사하고 무시와 조롱이 뒤따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쉽게 읽히는 글일수록 작가의 더 많은 피와 땀이 요구된다는 걸 독자들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뭔 뜻인지 이해도 되지 않는 현학적인 글을 천의무봉의 완벽한 글인 양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는지 나는 이따금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그랭구아르, 이건 자네와 나, 우리 둘만의 속내 이야기인데, 까만 털의 젊은 수컷 영양이 여복이 있었던지 블랑케트의 마음에 든 모양이야. 두 연인은 한두 시간 동안 숲에서 쏘다녔어. 녀석들이 무슨 말을 속삭였는지 알고 싶거든 이끼 밑에 숨어서 졸졸 흐르고 있는 수다쟁이 샘물에게 물어보게."  (p.45 '스갱 씨의 염소' 중에서)


알퐁스 도데의 단편 소설집 <풍차 방앗간의 편지>는 「레벤망」지와 「르피가로」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출판한 책으로, 책에 실린 단편 소설들은 대부분 알퐁스 도데의 고향인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을 배경으로 씌었다. 프로방스의 날씨, 풍경, 전설 등을 소재로 하여 작가 특유의 따뜻한 시선이 가미된 아름다운 작품은 읽는 이들의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의 소설은 동정심이 많은 인간성과 사물 및 개인의 신비에 대한 외경심도 포함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은 모파상이나 찰스 디킨스와도 유사점이 있다고 평가된다.


"나는 프로방스 농부들이 이야기할 때 곁들이는 멋진 지방 속담이나 대중적인 속담 혹은 격언 중에서 이보다 더 생생하고 독특한 속담은 들어보지 못했다. 나의 풍차 방앗간에서 60킬로미터 이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앙심을 품고 복수를 벼르고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할 때 이렇게 내뱉는다. "저 사람! 조심들 하게! 7년 동안이나 뒷발질을 벼르고 별렀던 교황의 노새 같은 사람이니까!" 나는 도대체 이 속담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교황의 노새가 어떤 것이며, 또 7년 동안이나 참았다는 뒷발질이 무슨 뜻인지 알아내려고 꽤 오랫동안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며 수소문했다."  (p.68 '교황의 노새' 중에서)


작품 중에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시골의 풍경이 변하게 되고 농경사회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며 지켜오던 전통이나 풍습이 파괴되고 급기야 농촌사회가 무너지기 시작한 지중해 연안 지방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작품도 있다. 이는 증기 제분 공장이 들어서면서 일거리를 잃게 된 방앗간 주인의 이야기로 대표된다. 뿐만 아니라 <메뚜기 떼>처럼 작가의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사실에 기반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세관원>, <황금 두뇌를 가진 사내의 전설> 등 비극적인 내용의 작품도 있다.


"경제적 고통과 오랜 지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을 끈기 있게 극복해 가면서 창작 생활에 온 힘을 기울인 도대의 모든 작품에는 소외된 인간들에 대한 따뜻한 인간애, 현실에 대한 씁쓸하고도 냉정한 인식, 당시 프랑스 사회에 대한 예리한 풍속 묘사 등 생생한 감동이 녹아 있다."  (p.292 '역자 후기' 중에서)


알퐁스 도데의 작품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평생 종지기로 살면서 아름다운 동화를 남긴 아동 문학가 권정생 선생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지병과 가난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맑은 눈을 잃지 않았기에 도데의 작품 속에서도, 권정생 작가의 작품 속에서도 순수함에 깃든 푸른 감동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평생을 고위 공직자로 살면서 단 한 번도 가난한 자의 편에 서지 않았던 자가 표를 위해서라면 서민의 대변자인 양 잘도 꾸며대는 작금의 세상에서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성 회복, 바로 그것이 아닐까. 알퐁스 도데의 <풍차 방앗간의 편지>를 읽는다는 건 누군가를 향해 보복의 정치를 꿈꾸는 이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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