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한명숙과 대한민국 검찰 - 한명숙 전 총리의 검찰과의 전쟁, 그 700일간의 기록
황창화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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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의 청렴도 평가에서 만년 하위권을 맴도는 기관이 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검찰청과 경찰청이 바로 그곳이다.  엄정한 법의 잣대로 국민의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그곳이 부패와 편법의 온상이 된 지는 꽤나 오래된 듯하다.  아니 제대로 된 검찰청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검찰은 많은 권한을 독점하고 있다.  법률 전문가가 아닌 내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수사권, 경찰 수사에 대한 수사지휘권, 구속영장 등 각종 영장에 대한 영장청구권, 피의자를 재판에 회부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소권, 법원 판결을 통해 확정된 형을 집행하는 형집행권 등으로 이 모든 권한이 검찰에 집중돼 있다. 기소 여부를 법규정이 아니라 검사 재량에 맡기는 `기소편의주의`가 형사소송법에 채택돼 있음도 간과하면 안 된다. 가히 세계 다른 나라에서 유사한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우리 검찰 권한은 막강하다.  어떤 권력이든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비대해진 권력은 자정능력과 자기 통제력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검사 개개인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고, 사석에서 만나면 예의 바르고 정중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분들이 많다.  그럼에도 시스템 내에서는 비열하고, 몰염치하며, 악날해지기까지 한다.  한마디로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현실에서 보는 듯한 느낌이다.  참여정부 초기에 일개 평검사가 대통령 앞에서도 할 말 다하던 그런 모습은 현 정부에 들어서 더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을 그렇게 순한 모습으로 잠재우기 위해서는 상응하는 반대급부가 있었겠지만 '정의와 양심'을 다른 무엇보다도 더욱 소중한 가치로 여겨야 하는 검찰이 권력에 기생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는 모습은 참으로 개탄스럽다.

 

한명숙 전 총리의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냈으며, 퇴임 후에도 지근 거리에서 그녀를 보좌하고 있는 저자 황창화 소장은 한명숙 전 총리가 기소에서부터 2번의 무죄판결을 받기까지의 길고 긴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어쩌면 한 전 총리가 무죄판결을 받은 것이 당연한 귀결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일반인의 입장에서 그런 판결을 받은 것도 한 전 총리였으니까 가능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온갖 회유와 압박 속에서 돈도, 빽도 없는 사람이었다면 쉽게 포기하였을텐데 그나마 일국의 국무총리를 지내신 분이니 그들과 맞서 이길 수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물론 재판에서 이겼다는 사실만으로 완전한 승리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처음에 받은 인상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지 않던가.  첫사랑, 첫눈, 첫인상 등 처음이라는 느낌은 일반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하여, 한 전 총리가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된 부정적인 이미지는 무죄판결을 받은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일부는 한 전 총리가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검찰은 그런 면에서 잃은 것이 없다.  비록 재판에서는 졌지만 그들이 원하던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으니까.

 

민주주의는 결국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너무도 당연한 말이 우리 앞에서 사실로 인식되기 전까지는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말하기 어렵다.  언제까지 우리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모습을 한 검찰을 지켜보아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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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리얼 쇼크 - 이미지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
최효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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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뮬라크르의 이미지가 확대재생산되고 과잉 증식하면서 하이퍼리얼 속으로 빠져드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는 자본과 미디어, 관료제(국가, 정치권력)의 합작품이기도 하고 자본과 미디어의 합작품이기도 하다.  우리사회에는 이미 가짜 실재인 시뮬라크르가 자가증식해 온통 시뮬라시옹의 질서로 둘러싸여 있다."  (P.368)

 

말이 참 어렵다.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귀신 씨나락 까 먹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삶과 실존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지난 월요일에는 회사의 송년회가 있었다.  유난히 추운 날씨였다.  매섭게 몰아치는 칼바람을 뚫고 직원들은 독거 노인들의 난방을 위한 '사랑의 연탄 배달' 행사를 가졌었다.  다들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나서는 모습이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시커먼 연탄을 들고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난방이 잘 되는 사무실에서도 춥다고 난리인데 하루 종일 영하의 추위에 오들오들 떨 생각을 하니 지레 겁부터 나는 것이었다.

 

연탄을 나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 어귀에서 연탄을 리어카에 옮겨 싣고 끌고 당기며 비탈길을 오르는 일도, 몸조차 가누기 힘든 좁은 연탄광에 연탄을 쌓는 일도 우리 같은 도시내기들에겐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점심을 먹고 회사를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인원이 많으니 두어 시간이면 다 끝날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던 사람들도 일을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지쳐가는 눈치였다.  얼굴이고 옷이고 할 것 없이 시커먼 칠을 한 직원들이 길바닥에 널부러지기 직전에야 일이 마무리 되었다.  짧은 겨울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넘고 있었다.

 

우리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커피라도 대접하겠다는 할머니 한 분이 있었다.

연탄 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방에 들어섰을 때, 발바닥에 시린 냉기가 전해졌다.  겨울 추위가 시작된 지 한참이나 지났건만 전기장판에 의지한 채 겨울을 나고 있는 모습이 짠하게 다가왔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킬 때마다 하얀 입김이 방안 가득 퍼졌다.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집은 큰길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산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매년 겨울이면 땔감을 구하는 것이 우리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루 일과였고, 눈이라도 쌓여 이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에는 연탄을 배달시키곤 하였다.  꽁꽁 언 연탄을 큰길에서부터 집까지 나르는 일은 나무를 하러 산에 오르는 일보다 더 힘들었다.  연탄의 가운데 구멍에 새끼줄을 끼워 양손에 한 장 또는 두 장의 연탄을 들고 눈 쌓인 비탈길을 오르노라면 칼바람에 손과 볼이 얼어 감각이 무뎌지곤 했다.  연탄 백 장을 나르려면 미끄러운 산비탈을 수십 번 오가야 했으니...

 

우리는 언제부턴가 석탄과 석유를 매개로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지금의 아이들에게 겨울은 그저  긴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오래도록 기다렸던 스키 시즌 쯤으로 인식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의식 속에 추위로 인한 삶의 고통은 없다.  현실이 복제된 과잉 현실(하이퍼 리얼)은 이제 원본마저 까맣게 잊혀지고 있다.  원본이 없는 실재는 더욱 더 실제적이다.  어른들이 자신이 겪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을 들려주어도 아이들은 믿지 않는다.  이러한 과잉 현실, 즉 하이퍼 리얼의 모습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의식의 사고',  즉 우리가 실재하는 어떤 대상과 맺는 관계는 사실상 심볼릭한 룰(구조- structure)이 상당부분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 구조주의 학파는 언어학자 소쉬르에서 비롯되었고, 프랑스의 사상가인 장 보드리야르는 구조주의 학파에서도 대표적인 비관론자에 속한다.  사유의 주체가 내가 아닌 구조(또는 이미지)가 지배하므로 현대인은 소비 행태와 어떤 사건을 대하는 반응에 있어 일정한 패턴을 형성하고 정형화 되는 경향이 있다.  미디어와 자본에 의해 형성된 가짜 현실의 영상 이미지는 현대인을 미디어에 종속된 로봇처럼 만들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견해를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 사회가 몰두하고 있는 11가지 뜨거운 이슈들을 통해 현실보다는 ‘만들어진 현실’을 믿기 원하는 대중의 속성과 이를 이용해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자본과 미디어의 본모습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보드리야르에 의해 정립된 하이퍼리얼(hyper real)의 개념은 현대 철학에 있어 중요한 한 축이다.  그러나 구조주의 얼개와 구조주의 철학가의 사상을 모두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전통철학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독자가 과학과 철학이 융합된 구조주의 이론을 습득하여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하여, 이 책의 저자는 9·11 테러사건 이후 이슬람의 이미지, 광화문 촛불 시위, 타블로의 학력 위조 논란과 포르노그래피의 속성 등 우리사회를 뒤흔든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해, 우리 현실 깊숙이 침투해 있는 하이퍼리얼 개념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인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다.  사고와 행동의 주체가 내가 아닌, 타인에 의해 조종되는 현대인의 모습은 비극적이다.  그렇다면 자본과 미디어에 종속된 현대인이 아닌, 미디어에 조종당하지 않는 당당한 사고의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미디어의 허구성을 제대로 간파할 수 있는 ‘미디어 독해력’을 조언한다.  외부의 구조와 룰에 지배되고 있는 현대인에게 보드리야르의 철학은 강한 울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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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꼼수다 뒷담화
김용민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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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꼼수다'의 고정 멤버였던 정봉주 전 의원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

대법원은 정 전 의원에 대한 상고심에서 상고를 기각하고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로써 정 전 의원은 향후 10년동안 피선거권이 박탈되면서 출마 또한 무산되는 등 정치생명의 위기를 맞게 됐다.  그렇다면 현역 정치인이었던 그가 이런 결과를 예상 못한 바가 아니었을텐데 현 정부와 대척점의 위치에 있는 '나꼼수'의 고정 패널로 활동했는가 하는 문제와, 아무리 현 정부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이견이 있을 수 있는 문제의 판결을 이렇게 서둘러 종결지을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의문으로 남는다.  유불리를 떠나 서로에게 치명적인 오점으로 작용할 사안이기에 누군가는 분명 무리수를 둔 셈이다.

  

나는 아주 편한 사람과 만나 가벼운 대화를 나누 듯 이 글을 쓰려고 한다.  순서가 뒤바뀌어 혼란스러울 수도 있고, 의미를 파악하느라 진땀을 흘릴 수도 있지만 그게 뭐 그리 대단한 문제이겠는가.  어차피 나 혼자 쓰는 블로그이고, 얼떨결에 방문한 분이라면 대충 훑어보거나 숫제 읽지 않아도 될 일이다.

 

먼저 전제를 달아야겠다.  공격성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보았던 프로이드의 주장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이 글을 전개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격성의 표출 양상은 너무나 다양해서 모두 다룰 수는 없고, 오직 말과 글을 포함한 언어적 관점으로만 그 범주를 축소해야겠다.  즉, 현 정부가 출범 초기부터 내내 지향해 왔던 강압적 방법을 동원한 언어적 공격성의 차단과 정권의 말기에 등장한 '나꼼수'의 이상 열풍을 들어 대화에 대한 주관적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먼저, 강제적인 겁박이나 실효적 법리로 인간의 본능을 차단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가령 성욕이나 식욕과 같은 본능을 법으로 억제하거나 차단할 수 있을까? 하고 묻는다면 열이면 열 다들 코웃음을 날릴 것이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질문이기에 세살배기 아이도 헛웃음을 지을 만하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욕을 하고, 또는 이간질이나 뒷담화를 일삼는 등의 공격성 표출은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나 내재된 본능이라고 보아야 한다.  가뜩이나 그것을 분출할 다양한 수단을 확보한 현대인에게 원천적 차단을 강제하거나 시도하는 자체가 바보가 아닌 이상 불가능함을 잘 알 것이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하지마라'는 항목을 늘릴수록 아이는 '일탈행위'의 쾌감과 스릴에 목 말라 할 테고, 그 강도가 심할수록 반발하는 힘은 더욱 강해지지 않던가.

 

그렇다면 이러한 본능에 대응하는 현명한 방법은 무엇일까?

상대방의 말에 주관적 평가를 더하지 말아야 한다.  즉, 자기식 소설 쓰기를 금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가령 아내가 "인간아, 술 좀 작작 마셔라."라고 했을 때, 남편이 이 말을 듣고 '아, 내 아내는 이제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구나.'하는 식의 주관적 평가, 또는 소설 쓰기는 결국 그렇게 받아들이는 자신에게만 상처를 입힌다는 점이다.  단순히 그 말에 내포된 의미만 받아들인다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주관적 평가가 덧붙여지면 결국 대화는 차단되고 자신에게는 심각한 상처만 입히게 된다.  자신이 쏜 화살에 자신이 맞는 격이니 보통 심각한 자충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학습을 통하여 체득된 이런 식의 소설 쓰기는 마치 이것이 자기 방어적 수단이라도 되는 양 습관화 되어 고치기 쉽지 않다.

 

다음으로, 바람직한 대화는 맹목적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자들의 '수다'가 여기에 가장 잘 부합할텐데 남자들은 사실 이런 대화에 취약하다.  목적이 없는 대화는 그저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문제다.  대화에 목적이 개입되는 그 순간부터 대화는 강의나 훈계와 같은 일방적 떠들기로 변질되고 만다.  무릇 세상의 모든 수컷들이란 가오잡기를 좋아하지 않던가.  현 정권은 한낱 수컷들의 가오잡기에서 한 발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내가 보는 견지에서'나꼼수'의 열풍은 대화의 기본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대화의 맹목적성(그들의 대화가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더라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수컷들의 가오잡기가 없다는 점)과 청취자의 말을 그들 스스로가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저자 김용민은 나꼼수의 제작 뒷담화와 흥행 비결에 대해 이 책에서 그 나름의 평가를 피력하고 있다.

 

오늘 정봉주 전 의원은 '나꼼수'의 고정 패널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화의 즐거움을 알게 된 '나꼼수'의 열혈 청취자들은 제2, 제3의 '나꼼수'를 이어갈 것이다.  즐겁자고 하는 것이 대화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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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푸드 - 삶의 허기를 채우는 영혼의 레시피 소울 시리즈 Soul Series 1
성석제 외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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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언제부터 어른이 되었던 걸까?'하는 그런...   같은 색으로 칠해진 벽의 한 귀퉁이처럼 그 경계마저 모호한 어느 지점에 동그마니 서 있을 때부터 나는 어른이었다.  아니, 어쩌면  흙먼지가 쓸려 금방 씻겨놓은 아가의 젖살처럼 뽀얀 마당에 뒤뚱뒤뚱 발자국을 찍던 그 시절부터 나는 어른이었는지도 모른다.  땅에 쓰인 발자국 편지의 흔적을 따라 몇 걸음을 옮겼을 뿐인데 나는 그새 어른이 되고, 한 여자의 남편이 되고, 한 아이의 아비가 되었다.  종종종… 외줄로 난 그 길을 따라 훌쩍 미래로 날아온 듯한 느낌.  당혹스럽다.  그 길에서는 늘 엄마가 삼시세끼 긇여내던 된장국 냄새가 난다.

 

이 책을 읽기 한참 전.  아마 올해 초쯤이었나 보다. 나는 되르테 쉬퍼가 쓴 <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읽었었다.  (http://blog.aladin.co.kr/760404134/4658747)최고급 레스토랑의 인정받는 수석요리사였던 루프레히트 슈미트씨는 채워지지 않는 삶의 허기 때문에 호스피스 병동의 요리사가 되었고, 그는 삶의 마지막 여정을 걷고 있는 그 병동의 환자들을 위해 추억의 요리를 준비한다.  호스피스 ‘로이히트포이어’에서 11년간 근무하며 인생의 마지막 요리를 준비해주었던 요리사 루프레히트 슈미트씨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였던 되르테 쉬퍼는 그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다.  그것이 내가 읽은 <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였다.  나는 지금도 그때 읽었던 한 귀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인생의 날을 늘려줄 수는 없지만, 남은 날들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는 있습니다."라는 문장.  나를 보호하고, 나를 표현하고, 내가 나일 수 있게 해주었던 내 육신에 대한 마지막 감사의 인사.  육신과 이별하는 마지막 순간에 육신이 기억하는 따뜻한 음식을 대접하는 행위는 얼마나 숭고한가.  나는 지금도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소울 푸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 책의 소제목만 옮겨 보면 이렇다.  굳이 이렇게 하는 까닭은 소제목만 읽어도 그 내용을 대강 어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먹밥의 맛_ 백영옥, 내 친구가 만드는 과자, 이브콘_ 조진국, 당신의 첫 피자는 어떤 맛이었나요?_ 서유미,연애는 한 그릇의 카레라이스_ 안은영, 햄버거에 대한 명상_ 이화정, 온몸을 깨우는 매콤함, 빨계떡_ 박상, 영혼의 거처_ 성석제, 지금 익숙한 것을 처음 만났을 때_ 한창훈, 수제비와 비틀즈_ 김창완, 엄마표 된장찌개_ 이충걸, 남쪽 나라에서 온 사나이_ 이우일, 달밧, 내 영혼의 다이어트_ 정박미경, 라면은, 완전식품이다_ 김어준, 토스카나의 수프를 추천하네_ 박찬일, 퓨전, 길에서 얻은 음식_ 노익상, 바닷내가 나는 밤이면_ 황교익, 커피향 엄마를 기억하세요?_ 이지민, 커피, 벗어날 수 없는_ 조동섭, 혼자 마시는 술_ 차유진, 재즈, 와인 그리고 박사님_ 남무성, 삶이 담긴 술잔_ 강병인.  도합 21명이다.

 

삶이 팍팍할수록 옛것이 그리운 법.  세상이라는 수레바퀴는 냉정하고 비열하게 한치의 자비심도 없이 흘러만 가고, 나는 그리움을 안주 삼아 농익은 막걸리 잔이라도 기울이고 싶다.  그때처럼 까마득하던 막걸리 심부름길에, 아무런 걱정도 없이 봄이 부르는 향기에 넋을 놓고 싶다.  오전에 푸슬푸슬 내리던 눈도 소리도 없이 잦아들고 까만 어둠이 세상의 모든 것인 양 단조롭다.

 

어릴 적 자주 부르던 노래를 잊지 못하 듯, 오늘은 문득 아주 오래도록 맡았던 엄마의 체취가 몹시도 그립다.  뜬금없는 안부전화에 내 목소리가 젖어있었나 보다.  뭔 일 있냐는 물음에, 그 전화선을 타고 젖은 짚섶에 앉아 푸성귀를 손질하던 어머니의 거친 손이 영상처럼 펼쳐진다.  나는 언제부터 어른이 되었는지, 군것질거리가 귀하던 시절, 콩 서리에 밤이 새는 줄도 몰랐던 그 기억들도, 그때의 음식들도 세월따라 차츰 잊혀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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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황홀 -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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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들은 속절없이 세월만 간다고 푸념아닌 푸념을 한다.

그래서일까? 한 해를 마감하는 매년 이맘때면 이틀이 멀다하고 술을 마신다.  술이라도 먹고 흠뻑 취하면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회색 신사('모모'에 나오는)의 출현을 알코올 에너지를 빌어 막아볼 수 있으려니 하는 억지와도 같은 주장이 술꾼들의 간을 두배쯤 부풀려 놓는다.  오지 않을 회색 신사를 기다리며 비장한 결의를 다지는 듯한 그들의 표정은 자못 진지하다.  진지하다 못해 제 풀에 제가 쓰러질 즈음이면 게게 풀린 눈으로 모모를 찾는다.  자신의 인생 역정을 차분히 들어줄 상대가 필요한 시간.  모모는 출장 마사지라도 간 것인지 밤새 보이지 않았다.  자정을 넘길 무렵,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정화의식에 돌입한다.  먼저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오래된 정화의식을 본떠 자신의 속을 남김없이 비우기.  사람들 발길이 드문 신성한 곳을 찾아 무릎을 꿇은 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먹은 음식물을 다 토한다.  일행은 그 신성한 의식을 지켜보며 등을 토닥여준다.  자신을 대신해 고통을 감수하는 예수를 생각하며.

 

때로는 오지 않는 회색 신사에게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회색 전봇대를 붙들고 드잡이질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시체놀이라도 하려는지 큰 대자로 누워 요지부동의 자세로 추위를 이기는 사람도 있다.  설산에서 고행한 석가세존도 그랬을까.  나는 그 모든 의식을 맨정신으로 지켜보며 마치 동화의 나라에 온 듯한 환상에 빠져든다.  세상의 성인이란 성인은 모두 한순간에 아이로 깜짝변신을 한 듯한 착각.  몇 첨 남지 않은 삼겹살이 불판 위에서 까맣게 타들어가는, 그야말로 뼈와 살이 타는 밤이다.  나는 문득 포장마차의 닝닝한 우동을 그리워한다.

 

나는 그 밤에 성석제의 <칼과 황홀>을 읽었다.

내가 처음 읽었던 그의 작품은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였다.  작가의 성격이 고스란히 글에 투영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지극히 낙천적이거나, 지극히 비관적인 성격이 아니라면 대개의 경우 작가는 자신의 성격을 은밀히 감춘다.  자신의 글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어쩌면 작가의 성격이 극단과 맞닿아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성석제의 글은 구수한 입담으로 배꼽을 쥐게 한다.  아마도 <칼과 황홀>을 다 읽은 독자라면 자신의 몸무게가 20그램쯤(배꼽 무게) 줄어들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이 책은 문학동네 인터넷 카페에 연재했던 글에 몇 대목을 더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었고, 1부는 '하루 세 번의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끼니와 밥상을 다루었고, 2부에서는 '마음의 노독을 풀어준다'는 표현으로 술 이야기를 담고 있다.  3부는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라는 제목에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데 찻상과 후식에 관한 이야기이다.  글의 말미에는 맛지도와 함께 작가의 말이 실려있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제 먹을 복은 다 타고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워낙에 없던 시절이었다.  허기를 달랠만한 것이면 뭐든 먹었던 시절.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먹었던 흰쌀밥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잡곡이 섞이지 않은 하얀 쌀밥에 반찬도 없이 왜간장과 김을 얹어 먹었던 그 밥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우리가 지금 느끼는 음식의 맛은 훗날 추억에 버무려져 더 맛깔난 음식으로 차려질지 모른다.  성석제의 <칼과 황홀>은 결국 음식에 얽힌 사람들과 에피소드의 귀결이다.  나는 '재미는 그 사람의 성격과 가치관에서 나온다'는 말을 닳도록 할 때가 있다.  성석제의 유별난 맛기행은 바로 낙천적인 그의 성격에서 비롯한 것은 아닐런지...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보고 듣고 겪고 만나고 맛보고 느끼는 것이 결국 내가 태어난 곳, 자라난 곳, 가장 가까운 사람에 귀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삶의 근간이 되는 그런 것들이 없다면 나는 세상을 지각할 기본적인 도구가 없는 셈으로 정말 줏대도 정신도 없이 황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오후의 나른한 권태가 밀려오는 시간.  나는 에스프레소의 진한 커피향에 끌려 후배의 커피숍에 들러 이 글을 쓴다.  내게 필요한 것은 각성제로서의 커피가 아닌 후배의 가벼운 미소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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