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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황홀 -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은 속절없이 세월만 간다고 푸념아닌 푸념을 한다.
그래서일까? 한 해를 마감하는 매년 이맘때면 이틀이 멀다하고 술을 마신다. 술이라도 먹고 흠뻑 취하면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회색 신사('모모'에 나오는)의 출현을 알코올 에너지를 빌어 막아볼 수 있으려니 하는 억지와도 같은 주장이 술꾼들의 간을 두배쯤 부풀려 놓는다. 오지 않을 회색 신사를 기다리며 비장한 결의를 다지는 듯한 그들의 표정은 자못 진지하다. 진지하다 못해 제 풀에 제가 쓰러질 즈음이면 게게 풀린 눈으로 모모를 찾는다. 자신의 인생 역정을 차분히 들어줄 상대가 필요한 시간. 모모는 출장 마사지라도 간 것인지 밤새 보이지 않았다. 자정을 넘길 무렵,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정화의식에 돌입한다. 먼저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오래된 정화의식을 본떠 자신의 속을 남김없이 비우기. 사람들 발길이 드문 신성한 곳을 찾아 무릎을 꿇은 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먹은 음식물을 다 토한다. 일행은 그 신성한 의식을 지켜보며 등을 토닥여준다. 자신을 대신해 고통을 감수하는 예수를 생각하며.
때로는 오지 않는 회색 신사에게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회색 전봇대를 붙들고 드잡이질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시체놀이라도 하려는지 큰 대자로 누워 요지부동의 자세로 추위를 이기는 사람도 있다. 설산에서 고행한 석가세존도 그랬을까. 나는 그 모든 의식을 맨정신으로 지켜보며 마치 동화의 나라에 온 듯한 환상에 빠져든다. 세상의 성인이란 성인은 모두 한순간에 아이로 깜짝변신을 한 듯한 착각. 몇 첨 남지 않은 삼겹살이 불판 위에서 까맣게 타들어가는, 그야말로 뼈와 살이 타는 밤이다. 나는 문득 포장마차의 닝닝한 우동을 그리워한다.
나는 그 밤에 성석제의 <칼과 황홀>을 읽었다.
내가 처음 읽었던 그의 작품은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였다. 작가의 성격이 고스란히 글에 투영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지극히 낙천적이거나, 지극히 비관적인 성격이 아니라면 대개의 경우 작가는 자신의 성격을 은밀히 감춘다. 자신의 글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어쩌면 작가의 성격이 극단과 맞닿아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성석제의 글은 구수한 입담으로 배꼽을 쥐게 한다. 아마도 <칼과 황홀>을 다 읽은 독자라면 자신의 몸무게가 20그램쯤(배꼽 무게) 줄어들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이 책은 문학동네 인터넷 카페에 연재했던 글에 몇 대목을 더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었고, 1부는 '하루 세 번의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끼니와 밥상을 다루었고, 2부에서는 '마음의 노독을 풀어준다'는 표현으로 술 이야기를 담고 있다. 3부는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라는 제목에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데 찻상과 후식에 관한 이야기이다. 글의 말미에는 맛지도와 함께 작가의 말이 실려있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제 먹을 복은 다 타고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워낙에 없던 시절이었다. 허기를 달랠만한 것이면 뭐든 먹었던 시절.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먹었던 흰쌀밥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잡곡이 섞이지 않은 하얀 쌀밥에 반찬도 없이 왜간장과 김을 얹어 먹었던 그 밥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우리가 지금 느끼는 음식의 맛은 훗날 추억에 버무려져 더 맛깔난 음식으로 차려질지 모른다. 성석제의 <칼과 황홀>은 결국 음식에 얽힌 사람들과 에피소드의 귀결이다. 나는 '재미는 그 사람의 성격과 가치관에서 나온다'는 말을 닳도록 할 때가 있다. 성석제의 유별난 맛기행은 바로 낙천적인 그의 성격에서 비롯한 것은 아닐런지...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보고 듣고 겪고 만나고 맛보고 느끼는 것이 결국 내가 태어난 곳, 자라난 곳, 가장 가까운 사람에 귀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삶의 근간이 되는 그런 것들이 없다면 나는 세상을 지각할 기본적인 도구가 없는 셈으로 정말 줏대도 정신도 없이 황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오후의 나른한 권태가 밀려오는 시간. 나는 에스프레소의 진한 커피향에 끌려 후배의 커피숍에 들러 이 글을 쓴다. 내게 필요한 것은 각성제로서의 커피가 아닌 후배의 가벼운 미소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