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삶의 물기를 쪽 뺀 나머지 것을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이를테면 삶의 형식이랄 수도 있고, 삶의 골격 혹은 삶의 구조일 수도 있고, 암튼 도덕이나 예법일 수도 있는 바싹 마른 삶의 이면은 생각보다 비루하거나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애써 숨기려 하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그것이 마치 삶의 근간을 이루는 것인 양 부풀리거나 분에 넘치는 가중치를 부여하곤 한다. 그것은 마치 소설의 구조 또는 형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소설 자체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고 주장하는 바와 같다. 과연 그런가. 소설가가 제 아무리 형식에 충실한 소설을 썼다 할지라도 작가의 문장력과 더불어 소설 속 인물 간의 긴밀한 연계성, 허를 찌르는 반전(혹은 자유로움), 소위 삶의 물기라고 할 수 있는 슬픔과 기쁨을 적절히 배분하지 않으면 소설은 소설로서의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삶의 전형처럼 어떤 형식이나 목표에 따라 기계처럼 사는 사람의 인생이 대단해 보이기는 하지만 뭔가 2% 부족하다고 느끼는 이유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는 삶의 물기가 쪽 빠진 비루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사라지는 것과 다시 생겨나는 것들이 비슷하게 균형을 맞추는 까닭에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은 일정한 수를 유지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면 우리가 제 수명을 다하고 사라지는 것도 그닥 불만스럽다거나 아쉬워할 일도 아니지만 인간의 문명이 계속되는 한 우리가 했던 경험과 기억들은 면면히 이어질 테니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한다고 삶의 전형을 마련하고 그에 따르도록 강요한다는 건 인류사적인 측면에서는 얼마나 큰 손해인가.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같거나 비슷한 삶을 반복해서 살아본다는 건 그야말로 시간의 낭비인 셈이 아닌가. 그것처럼 따분한 일도 다시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상식에 벗어나는 '뻘짓'도 자주 하고, 예기치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자주 만날 수 있는 까닭에 전형적인 틀에 따라 살고자 노력하던 사람도 그들로 인해 덩달아 영향을 받게 마련이므로 삶은 의도치 않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그 다채로움으로 인해 우리는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 위험 때문에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집안에서 웅크린 채 보낸 기간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그 덕분에 나는 책을 몇 권 더 읽었고, 산책을 하는 시간이 좀 더 늘었으며, 인생에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기준을 새롭게 세울 수 있었다.  BTS의 노래처럼 삶은 계속된다(Life goes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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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눈이 조금 내렸다. 무게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메마르고 포슬포슬한 눈이었다. 다만 흔적처럼 쌓이는 눈을 보며 '이런 날엔 뜨뜻한 아랫목에 엎드려 늘어지게 책이나 읽는 게  딱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들으면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네.' 하면서 혀를 끌끌 차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처럼 눈이 조금 쌓이고 소리도 없이 시간이 흩어지는 날이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실컷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지곤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게으름이라는 건 사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시체처럼 반듯하게 누워 하루 종일 멀뚱멀뚱 TV만 보거나 푸지게 낮잠을 자는 등 움직임이 거의 없는, 말하자면 무위도식의 삶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 '게으름'이라는 형태의 질병에 가까운 것이고, 엄밀한 의미에서의 '게으름'은 오늘 당장 혹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던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걸 일컫는다.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룬 채 지금의 일을 계속한다는 건 내 사정을 모르는 남들이 보기에는 일견 진득하니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내가 이런 식으로 미루고 미룬 일들은 언젠가 나도 모르는 우렁각시가 짠 하고 나타나 말끔하게 처리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의 리스트에 차곡차곡 쌓여만 간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지체되면 일의 우선순위에 따라 결국 포기해야 하는 일들이 속출하고야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게으름'으로 인해 미뤄지는 일들은 결국 주변의 사람들에게 전가되거나 답답한 사람이 우물을 파는 식으로 부지런한 누군가를 괴롭히는 한 요인이 된다.

 

게으름의 사전적인 의미는 '행동이나 일 처리가 느리고 일하기 싫어하는 버릇이나 성미'라고 한다. 그러나 사전적 의미에서처럼 게으름이 항상 부정적 결과만 도출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게으름을 피우는 누군가로 인해 다른 누군가의 일이 증가하고 피곤하게 하는 건 맞지만 게으름에 빠진 한 인간이 그 일을 주야장천 계속함으로써 의외의 성과를 나타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덕무와 같은 간서치와 함께 사는 사람은 열불이 나고 속이 터질 일이지만 언젠가 불후의 명저를 남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역사를 바꿀 만큼 위대한 성과를 내는 사람은 더없이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라 한없이 게으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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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확진자가 드디어 천 명을 넘어섰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마치 이런 상황을 무척이나 기다려왔던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국가의 위기 상황에 국민 중 1인으로서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솔직한 기분이라면 나날이 악화되는 작금의 상황에 대한 걱정이 70%, 나머지 30%는 이런 상황을 야기한,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괜한 분노라고 할 것이다. 당연하게도 외출도 삼간 채 조심조심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국민들과는 달리 술집이며, 음식점이며, 영화관이며, 심지어 호텔 파티룸에 이르기까지 조심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분별없는 젊은이들에 와락 화가 치솟는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작금의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교회로 교회로 신도들을 불러들이는 정신 나간 종교인들도 있고, 코로나의 무서움이라곤 전혀 모르고 지냈던 일자무식의 무지렁이 촌부도 더러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젊은 청춘들의 일탈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들을 보면서 감탄하거나 어떤 경외심을 느끼는 이유는 그들의 생명력, 목숨을 바쳐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겠다는 일념, 바로 그것이 아니던가. 코로나라는 엄중한 상황에서도 젊은이들은 짝짓기를 하기 위해 술집으로, 교회로, 호텔로 떠도는 게 연어들의 진한 생명력과 비교하여 무엇이 다를 수 있을까. 물론 생각이 있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연어들의 행태를 단순 비교한다는 게 불만인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신비한 이유처럼
그 언제서부터인가 걸어 걸어 걸어오는 이 길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가야만 하는지
여러 갈래 길 중 만약에 이 길이 
내가 걸어가고 있는
돌아서 갈 수밖에 없는 꼬부라진 길 일지라도
딱딱해지는 발바닥 걸어 걸어 걸어 가다 보면
저 넓은 꽃밭에 누워서 나 쉴 수 있겠지  (강산에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아침에 내린 눈으로 아파트 주차장에는 흰 눈을 뒤집어쓴 차들이 빼곡하다. 이렇게 쌓인 눈을 올겨울 들어 처음이지 싶다. 말하자면 첫눈인 셈인데 예년과 다르게 마음은 그저 착잡할 뿐이다. 코로나 확진자는 확산 일로에 있고, 일 년 가까이 자신의 생명력을 억누르며 살았던 대부분의 젊은 청춘들 중 일부 젊은이들의 일탈을 마냥 비난할 수도 없고... 첫눈에 대한 감상 치고는 이래저래 심란한 기분이다. 전염병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있는 국가의 역할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시국을 어떻게든 빨리 종결지어야겠다는 국민들의 일치된 마음과 행동이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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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공수처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로써 공수처법이 국회를 통과하고도 정작 공수처 구성에 있어서는 국민의힘의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혀 지지부진하기만 했던 공수처의 출범이 비로소 가시권에 들어온 셈이다. 물론 아직도 공수처장의 선출과 국회 청문회 등 남은 일정은 첩첩산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공수처의 설립이 기정사실로 굳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검찰을 견제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드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의 행태를,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이 폭로한 '검사 술 접대 의혹'에 연루된 현직 검사 3명 중 1명만 재판에 넘겨지고 나머지 2명은 각각 100만 원에서 4만 원이 모자라는 96만 원의 향응을 받았다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받는 코미디와 같은 행태를 더는 보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이와 같은 배경에는 물론 180석에 가까운 거대 여당을 만들어준 국민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당의 의석수가 야당과 엇비슷하거나 몇 석 많은 수준에서 머물렀다면 몇십 년째 대다수 국민의 염원이었던 공수처는 앞으로도 영원히 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선거 때마다 여, 야를 가리지 않고 공수처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도 정작 실천 단계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외면하기에 급급했던 야당 국회의원들의 뻔뻔한 행태를, 필요에 따라 기소, 불기소를 제멋대로 결정하던 검찰의 막가파식 행태를 우리는 이제 더는 보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그와 같은 복장 터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법이 그러니까' 하면서 참을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국민 대다수가 '화병' 전조 증상을 안고 살았던 지난 세월을 웃으며 회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검찰을 앞세워 독재정권에 기생하면서 온갖 특권을 향유하던 수구 보수 세력의 종말은 아닐지라도, 더는 그들에게 불법적인 특권의식과 법을 이용한 교묘한 부정축재의 기회는 제공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공수처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와 더불어 검찰개혁에 반대하고, 비위로 점철된 검찰 조직의 우두머리 윤석열에 대한 징계위원회가 열리고 있다.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언론을 이용하여 국민 여론을 호도하고 검찰개혁이 마치 국가 대세를 그르치는 반헌법적 행위인 양 연일 떠벌렸던 검찰과 보수 언론의 행태도 오늘을 기점으로 더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물론 나의 바람에 그치겠지만 말이다. 독재권력에 기생하던 모든 세력들, 언론들, 기업인들, 그리고 소수의 종교인들은 악을 쓰고 덤벼들 것은 명약관화한 일, 그러나 역사는 그 모든 저항을 뒤로한 채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오늘은 올해 수능을 치룬 수험생이 있는 이웃에게 떡이라도 돌려야겠다. 겸사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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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몇몇 제한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도 속 터지는 경험인 아주 없는 건 아니어서 때로는 '이 사람들이 지금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의 인물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 때가 더러 있다. 그것은 대개 정치인에 대한 개인적 혹은 일부 지지층의 평가를 대신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데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와 무수히 많은 반헌법적 행위에 대해 비난할라치면 그들의 주장인 즉,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공과가 있게 마련이고 한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그의 공과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견 일리가 있는 주장인 듯 보이지만 이 말보다 더 허무맹랑한 말도 다시없을 것이다. 예컨대 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를 지적했을 뿐이고, 그가 정권에 있을 때 독재정치를 펼침으로써 자신은 처벌조차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국민들도 그의 죄를 따져 물을 수 없었던 역사적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것인데, 말하자면 공을 말하는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이런 논리를 들고 나오는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모든 것을 잘못한 이도, 무결점의 삶을 산 사람도 있을 수 없다. 인생은 우리의 생각보다 길기 때문이다. 공과를 함께 논한다면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히틀러나 일본의 A급 전범들, 심지어 곧 출소하는 조두순에게서도 과만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공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 역시 그 공에 의해서 영웅 취급을 해야 하는가 말이다. 죄는 죄대로, 공은 공대로 그때그때마다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라는 이유로, 경제적으로 부유하다는 이유로 죄에 대해 처벌을 받지 않았다면 후손들은 그에 합당한 욕을 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니가. 당대에 그는 자신의 공에 대한 대가를 누릴 만큼 누렸으니까 말이다.

 

‘하나의 악으로 그 선을 잊지 말고, 작은 흠으로 그 공을 덮지 마라(不以一惡忘其善. 勿以小瑕掩其功)’고 했던 당 태종 이세민의 조언은 일반인에 대한 평가나 지금 현재 살아 있는 자에 대한 평가에는 유효할지 모르나 권력자로 살았던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는 적절치 않다. 이미 그는 살아생전에 공에 대한 대가를 누릴 만큼 충분히 누렸기 때문이다. 사후에는 이제 그에 대한 과가 들추어질 뿐이다. 그것이 공정한 역사가 아닌가.

 

다행스럽게도 전두환 씨나 이명박 씨에 대한 공과 과는 당사자가 살아 있을 때 진행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지금 현재 진행 중에 있지만 그들 모두가 죽고 난 뒤에는 후세인들이 그들의 공과를 함께 평하게 될 것이다. 처벌받지 않은 자의 과를 사후에 논할 때 '한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그의 공과를 함께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이, 그것도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그런 무식한 말을 입에 담는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인생은 길고, 살다 보면 누구나 선과 악을 오갈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이다. 그러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논리로 사람들을 현혹시키지 말자. 날씨가 차다. 오늘은 대입 수능일이자 세계 장애인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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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0-12-03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꼼쥐님은 좋아요를 안 누를 수가 없네요

꼼쥐 2020-12-09 18:28   좋아요 0 | URL
테레사 님이 저의 글을 너무 좋게 봐주신 게 아닐까요?
기분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