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눈이 조금 내렸다. 무게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메마르고 포슬포슬한 눈이었다. 다만 흔적처럼 쌓이는 눈을 보며 '이런 날엔 뜨뜻한 아랫목에 엎드려 늘어지게 책이나 읽는 게  딱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들으면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네.' 하면서 혀를 끌끌 차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처럼 눈이 조금 쌓이고 소리도 없이 시간이 흩어지는 날이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실컷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지곤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게으름이라는 건 사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시체처럼 반듯하게 누워 하루 종일 멀뚱멀뚱 TV만 보거나 푸지게 낮잠을 자는 등 움직임이 거의 없는, 말하자면 무위도식의 삶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 '게으름'이라는 형태의 질병에 가까운 것이고, 엄밀한 의미에서의 '게으름'은 오늘 당장 혹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던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걸 일컫는다.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룬 채 지금의 일을 계속한다는 건 내 사정을 모르는 남들이 보기에는 일견 진득하니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내가 이런 식으로 미루고 미룬 일들은 언젠가 나도 모르는 우렁각시가 짠 하고 나타나 말끔하게 처리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의 리스트에 차곡차곡 쌓여만 간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지체되면 일의 우선순위에 따라 결국 포기해야 하는 일들이 속출하고야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게으름'으로 인해 미뤄지는 일들은 결국 주변의 사람들에게 전가되거나 답답한 사람이 우물을 파는 식으로 부지런한 누군가를 괴롭히는 한 요인이 된다.

 

게으름의 사전적인 의미는 '행동이나 일 처리가 느리고 일하기 싫어하는 버릇이나 성미'라고 한다. 그러나 사전적 의미에서처럼 게으름이 항상 부정적 결과만 도출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게으름을 피우는 누군가로 인해 다른 누군가의 일이 증가하고 피곤하게 하는 건 맞지만 게으름에 빠진 한 인간이 그 일을 주야장천 계속함으로써 의외의 성과를 나타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덕무와 같은 간서치와 함께 사는 사람은 열불이 나고 속이 터질 일이지만 언젠가 불후의 명저를 남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역사를 바꿀 만큼 위대한 성과를 내는 사람은 더없이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라 한없이 게으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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