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부터 다시 고된 노동의 시간과 계약을 맺었다. 그동안 편하게 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적당한 임금에 만족하며 여행 다니고 싶은 것 좀 다니고, 실컷 좀 놀자고 생각한 1년이었지만 좀처럼 여행도 놀지도 못하고 시간이 손가락 사이의 모래처럼 쉽게 빠져나갔다.

작년 이맘때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나에게 좀 시간을 줘야 한다며 나에게 허락을 받고 퇴사했다. 하지만 다시 들어가는 노동의 시작은 퇴사했던 회사다. 좀처럼 좋지 않았던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무작정 놀고 싶었던 것이었나.

 

 

 

여름 런던, 파리 여행이 나에게 준 여파가 너무 컸나보다. 여행을 갔다 오고 다시 계약을 하기로 한 회사와는 잠시만 보류라는 전화를 하고 무작정 여행 관련 책을 사들이고 있었다. 내년에는 이탈리아 여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책을 많이 샀다. 작년 체코, 오스트리아 여행은 멍 때리며 일행을 따라 다녔던 것과 달리 이번 런던, 파리는 매우 능동적으로 움직인 여행이었기 때문에 다녀와서 만족도는 작년보다 훨씬 강했다. 그래서 이탈리아는 완전히 혼자의 힘으로 계획을 짜보자며 책을 사다가 나도 모르게 여러 지역의 여행 책을 사 놓고 말았다. 이곳의 여행이 끝나면 다른 곳도 가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차선책이 필요했던 것도 있었다. 이탈리아 여행이 안 되면 스페인, 그것도 어렵다면 터키로 자꾸만 나 혼자 일정을 변경 시켰다. 하지만 이탈리아를 구성했던 여행 동지들이 깨지고 말았다. 결국 정말로 이탈리아는 나 혼자 가게 될 것 같다. 그것도 이제 내년이라고 절대적으로 결정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런 상실감에 나는 약 한달 정도를 정신 줄을 놓고 말았다. 책도 읽히지 않았고 무엇보다 여행관련 책을 사 들인 것을 거의 읽지 않고 있다. 11월의 출근이 확실해 졌으니 이제 내가 원하는 장기 여행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가끔 나는 세상이 너무 힘들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여행 책을 읽을 때마다 죽고 싶지 않다. 아직 이렇게 멋진 곳을 다 가보지도 못했는데 왜 죽어.

 

 

 

 

 

 

 

 

 

 

 

 

 

 

 

 

 

 

 

 

 

 

 

 

 

 

 

 

 

 

죽고 싶은 나의 마음을 가장 간절하게 잡고 있는 책들은 역시 한 달씩 살기의 책들이다. 베니스, 로마에서 한 달씩 살다니. 얼마나 낭만적인가 말이다. 한때는 제주도에서 한 달을 살다가 오자는 마음도 있었지만, 보름정도 제주도에서 머물러 보니 한 달이라는 두근거리는 마음이 사라졌던 것은 있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역시 있었던 곳을 떠나는 일탈은 흥분되는 마음을 좀처럼 가라앉히기 어려운것 같다.

 

 

 

 

사실 9월 초에 인간적인 실망감과 대인관계의 환멸이 느껴지는 일을 경험한지라 사는 것이 너무 무료했다. 그런 일이 10월초에도 벌어졌다. 올해 나는 참 사나운 일이 많은가보다며 마음이 공허했다.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보다 분명 서로의 배려가 없었음을 인정하고 싶다. 나는 이런걸 인정하고 미안해하는데 그들은 전혀 그런 반성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이것이 인간관계의 가장 어려운 순간인것 같다. 이런 일 때문에 나는 딱 한번 죽고 싶었다. 하지만 죽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집에 쌓아 놓은 책들, 그 속에 반짝이는 여행책들 때문이다.

 

 

10월이 가기 전에 분명 어딘가는 갔다 와야 런던의 그리움을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는 붕 떠있는 내 발은 정착을 못할 것이고 결국 날아서 어디론가 가버릴수 있을 것이다. 나도 책들의 저자처럼 한 달씩, 도시에 머물다 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건강하게 살아야지. 그렇게 죽지 말아야지. 아직도 사들인 여행 책은 절반도 넘게 책장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