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유산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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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사라지지 않을 것들 [영원한 유산 - 심윤경]



간혹 작가의 몇몇의 작품을 읽다보면 작가의 심성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작가가 쏟아내는 작품들이 내 취향과 맞지 않더라도 출판을 기다리며 읽곤 하지만 몇 년간 쏟아낸 심윤경 작가의 작품들은 앞에 얘기한 것들과 거리가 있었다. 특히 사랑이 달리다 시리즈는 그녀의 작품이 맞는 건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이번 작품도 그랬다면 작가와의 이별을 고할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를 애정 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 기다려온 그녀의 작품 [영원한 유산]은 오래전 그녀의 향기가 났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찍은 사진 한 장의 궁금증으로 시작된 그녀의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 이후 20여년이 흐른 후 이해동이라는 청년은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UN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줄여서 언커크(UNCURK)라 불리는 곳에서 애커넌의 호주 대표의 통역을 맡으며 사기죄로 2년 2개월의 실형을 살고 나온 윤원섭을 만나게 된다. 이름 없는 독립 운동가의 자손인 이해동과 악덕하기로 유명했던 친일파의 자손인 윤원섭의 만남은 이 소설 [영원한 유산]의 내적, 외적 갈등을 모두 담아내고 있다.


 

친일을 하였지만 그것이 훈장 같은 윤원섭이 바라보는 적산가옥 벽수산장을 바라보는 느낌은 부끄러움이나 죄의식이 전혀 없다. 그녀에게 그런 것보다 큰 불만과 치욕은 지방 출신이라는 것에 격분을 더 하는 사람이었다. 그 어떤 독립투사보다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을 욕하는 것에는 그의 친일 행적보다 지방 출신인 주제에 중앙 귀족인 척 행세한 신분 세탁자인 것이 화가 나는 부분이라고 했다. 귀족이 아닌 것이 귀족 흉내를 내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눈에 밟히는 큰 죄가 되었다. 그의 다른 일부분의 행적들은 모두 그 밑으로 사라지는 연기 같은 것이었다.

 

이해동이 윤원섭 일가의 친일 행적을 애커넌에게 말해보았자 그저 지나버린 남의 나라 일뿐이었다. 문득 부질없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 대상이 호주 대표 애커넌이 아니라 독일의 대표였다면, 폴란드의 대표였다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모두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포장으로 끝날 일이었을까.

애커넌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윤원섭의 거만한 모습이 흉하기 그지없다. 2년의 실형을 살고 나온 자의 모습에서는 반성이라는 것은 없고 다시 자신의 것을 찾으러 온 듯 당당함은 벽수산장의 숨은 곳을 알려주는 모습에서 더 여실히 드러난다. 그녀에게는 이완용이 갖은 지방색이란 없다는 듯. 호수만 200여 평의 땅이라 아방궁이라 불렸던 그곳의 모습을 다시 찾은 자신의 영광인 듯 두 눈으로 담고 있을 윤원섭, 그 모습에 불같은 마음이 명치끝까지 타 올랐을 이해동의 얼굴은 또 어떠했을지.


 

“해동은 그 모든 울분과 통증을 넘어 마지막 한마디를 뱉었다. 아름답다.

저택은 아름다웠다. 그것을 소리 내어 말하기가 그렇게 고통스러웠다. 스스로 벼락이라도 때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말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윤덕영의 썩은 정신과 나라를 팔아먹은 자금으로 만들었는데도, 저택은 아름다웠다.“ P252




저자가 말하는 벽수산장이 너무 궁금해졌다.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었을까. 저자의 소설의 시발점이 되었던 할머니와 찍은 사진 속의 멀찍이 찍혀 있는 그 유럽풍의 저택.




[송석원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일대를 말한다. 천수경(조선 후기의 위항 시인)이 송석원이라는 집을 짓고 살면서 그를 중심으로 열린 옥계시사 또는 송석원시사가 널리 알려졌다. 송석원시사의 부흥을 계기로 이 일대의 지명은 옥류동 계곡을 말하는 옥계(玉溪) 대신 송석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천수경 사후 송석원의 주인은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장동 김씨라 불린 신 안동 김씨와 여흥 민씨를 거쳐 1910년경에 윤덕영 (순종의 계후 순정효황후의 숙부이자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형이다.)(이 송석원을 가지게 되었다. 윤덕영은 일제 강점기에 옥인동 땅의 절반 이상을 사들이고, 송석원 터에 프랑스풍 건물인 양관(洋館)이 중심이 된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는 저택을 지었다. 양관은 한국 전쟁 전후에 한국통일부흥위원단 청사로 쓰이다가 1966년에 불탔고, 1973년에 철거되었다. 해방 이후 옥류동 계곡 주변에는 많은 주택이 들어섰고, 주민들은 여전히 그 일대를 송석원이라 부른다.


벽수산장은 윤덕영이 프랑스에서 본 귀족 별장 설계도로 1931년 자신이 소유한 옥인동 대지에 저택 건설을 착수하여 1935년에 완공이 되었다. 윤덕영은 5년 후 1940년에 사망하였고, 이후 덕수 병원으로 쓰였고 한국 정쟁 중에는 미8군 장교 숙소로 이용되었으며, 1954년 6월부터는 한국통일부흥위원단 (UNCURK, 언커크) 본부가 입주하여 사용하다가 1966년 4월 5일 보수 공사 도중 화재로 전소되었다. 언커크는 화재 직후 외교 연구원 건물로 청사를 옮겼고, 양관은 총무처에서 관리되다가 1973년 6월에 철거되었다.- (부분 나무 위키 발췌)







화려한 양관은 모두 소실된 벽수산장은 서용택 가옥과 박노수 가옥이 부속 건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벽수 산장 정문 기둥 4개중 3개가 남아 있고 옥인동 62번지 소재 건물 동쪽에는 벽수산장의 벽돌담과 아치 흔적이 남아 있다. 역사의 기록이 담겨진 부분은 대부분 소실되어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의 기억에만 남아 있고 이제는 그 본래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해동은 저택의 아름다움을 말하기는 것이 괴롭다고 했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하는 상처를 갖고 있는 유산. 그런 유산을 낳지 말았어야 했지만 이미 만들어진 시간의 흔적을 어떻게 지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불 타 소실된 건물을 바라보았던 해동의 무거운 걸음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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