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의 탄생 낭만픽션 3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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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80년대 부랑인을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감금하고 강제 노역을 시킨 부랑인 수용시설이 한국에도 있었다. 『범죄자의 탄생』은 호적 장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해 이리저리 떠도는 무숙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단편집인데, 이들 역시 수감자와 같은 생활을 하며 중노동을 한다는 점에서만큼은 한국의 경우와 비슷할는지도 모르겠다. 역자 후기에선 이 단편집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도망'을 말한다. 총 열 편의 글에는 오로지 감금된 생활에서 벗어나고픈 무숙인들의 처지가 그려지고, 설사 그들이 도망에 성공했다 한들 그 뒤에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의 신변 혹은 감옥이나 외딴섬, 광산에서의 이야기는 일종의 간수였던 자가 거꾸로 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가 가다밥(네모난 틀에 찍혀 나오는 감옥 밥을 가리키는 속어)을 먹게 되거나(「특별 사면」), 힘을 모아 함께 탈출하려는 자들마저도 서로를 속고 속이며(「도망」), 형기 없는 유형자를 담당하는 관리의 업무 태만으로 평생 사면을 받지 못할 처지에 놓이는가하면(「유형지 탈출」), 감옥에서의 동료에게 속아 전전긍긍 마음 졸이며 사는데(「붉은 고양이」), 그중 특히나 「특별 사면」은 누구라도 무릎을 칠 만한 작품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는 이 년 만에 유배된 섬에서 돌아온 자를 어떻게든 궁지에 빠뜨리려는 관리가 등장한다. 그가 무숙자를 옥죄는 이유는 단 하나, 그와 살을 붙이고 지내는 여자를 얻기 위해서. 그런데 책에서 묘사되는 무숙인이란 뭔가. 호적이 없어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도 어렵고, 에도 시중에 몸을 두기 위해선 누군가의 보증이 필요한데다가, 혹여 그자가 범죄를 저지르면 보증인들이 연대 책임을 지게 되는 거다. 관리는 그 무숙인이 어렵사리 일을 시작하기만 하면 찾아가 훼방을 놓고 결국엔 여자를 을러 안기 직전까지 간다. 하지만 평소 불법으로 주변 상인들에게서 돈을 우려낸 행실이 발각돼 외려 자신이 감옥에 들어가고 마는데, 감방 안에서 그의 직업이 들통나 '감방 신입에게 대접되는 특별한 저녁식사'를 먹을 위기에 몰린다. 자, 이 『범죄자의 탄생』의 원제는 '무숙인별장(無宿人別帳)'이다. '인별장'이란 에도시대 때 각 사찰에서 관리하던 호적 장부로, 농촌에서 도망 나온 탓에 인별장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자가 바로 무숙자다ㅡ단 '무숙인별장'이란 서류는 존재하지 않으며 세이초 자신이 만들어 낸 말이란다. 그런데 여기서 책 표지를 보자. 우타가와 히로시게가 그린 한겨울 이른 아침 참배하러 가는 사람들의 모습(<虎の門外あふひ坂>)이나 요시와라 유곽의 인산인해가 펼쳐지는 우타가와 구니사다의 그림(<北郭月の夜桜>)과 같은 다소 완만하고 평화롭다고까지 할 만한 우키요에가 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표지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온데간데없고 온갖 아수라장, 욕망과 속임수가 판치는 암울한 사람/사람들의 몸부림뿐이며, 이자들을 빚어낸 책임은 바로 그 사회라는 것, 겉표지에 적힌 것처럼 '부조리한 사회, 사회가 범인이다!'라는 말이 더욱더 부각되기만 한다. 그리고 사회적 안전망에서 누락된 자들, 그들을 범죄의 길로 인도한 사회야말로 진짜 범인이라는 의미심장한 문구만이 가슴이 와 꽂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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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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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라는 말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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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로마사 - 7개 테마로 읽는 로마사 1200년
모토무라 료지 지음, 이민희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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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를 다루려면 그 역사와 함께 멸망 또한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모토무라 료지의 말대로 로마 제국의 멸망은 '고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책은 다소 무모해 보이기도 하지만 크게 기승전결 네 부분으로 나뉘어 로마사 1200년을 톺는다ㅡ공화정, 군대, 시민(권), 그리스도교 탄압, 멸망 등등. 특히 내가 보기에 로마가 강력한 제국일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는 관용과 포용력이 아니었나 싶다. 일전에 어느 인터넷 매체에서 로크의 시민정부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중 '욕망에 봉사하면서 욕망을 조절하는 이성적 국가는 가능한가'라는 부분이 생각난다. 그 내용 일부를 잠시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홉스는 국가를 가리키는 말로 커먼웰스(commonwealth)를 사용하는 반면 로크는 이 용어를 사용하는 데 단서를 달았다. 홉스의 커먼웰스가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위해 조직된 국가로서 사적 주권이나 이해보다 공공적 이해와 공공적 질서를 중시한다면, 로크의 '키비타스'적 의미가 강조된 국가는 공공적인 것이 사사로운 것을 압도할 가능성을 경계하면서 공적 이성을 지닌 자로서의 시민의 자율성에 우선권이 있는 정치공동체였다.」(프레시안, 2011) 여기 등장하는 '키비타스(civitas)'에는 '시민권'과 '국가'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p.142) 한때 적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말살하거나 배척하지 않았던 거다. 늘 세계사를 비롯한 각국의 역사를 훑어보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상황과 비교하게 되는데,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사회와 국가는 과연 저 옛날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물론 거기에는 일장일단이 있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문젯거리 또한 많지만, 귀족의 의무라고 여겨질 정도의 부의 재분배만 보아도 확실히 로마는 다르긴 달랐던 모양이다. 심지어 로마에서는 이 부의 재분배가 국가운영을 지탱할 정도로 대규모로 이루어졌고 공공사업에 드는 비용이나 공무원의 급료를 부유한 귀족이 모두 개인적으로 부담했다 한다. 독재를 혐오하는 자유민이라는 의식과 엄격한 군기 또한 매한가지 맥락에서 읽힐 수 있을 듯한데, 이 또한 현재와 나란히 두고 보면 대체 역사라는 것이 진보하는 것인지 퇴보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반복을 거듭할 뿐인지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어느 역사이건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며 그저 창고에 남아 있어야만 할 먼지 쌓인 기록에 불과한 것도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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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상식이다 - 아는 만큼 맛있는 뜻밖의 음식 문화사
윤덕노 지음 / 더난출판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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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일본어로 다쿠앙(たくあん)이다. 겨우내 먹을 것이 없던 저 옛날 다쿠앙이란 스님이 짠지의 일종으로 만든 것으로, 당시 절 근처를 지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스님의 이름을 그대로 따 '다쿠앙'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사찰이라는 장소도 장소이거니와 계절, 또 음식을 오랜 시간 보관해야 하는 애로로 인해 만들어졌을 터다. 책에는 비슷한 맥락으로 낫토(納豆)와 청국장이 등장한다. 낫토의 유래에 관한 설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단무지와 매한가지로 절과 관련이 있다. 옛날 일본에서는 절에서 사용되는 각종 물품을 만들어 관리하는 납소(納所)가 있었다는데, 이 납소에서 콩 발효 식품을 관리했기 때문에 납두(納豆)라는 이름이 생겨 바로 여기서 낫토가 유래되었다는 거다(p.254)ㅡ또 다른 하나는 사무라이의 전쟁과 관련이 있다(말에게 먹일 콩을 삶다가 적의 공격을 받자 콩을 버리기가 아까워 섶에 콩을 담고서 그대로 도망했는데, 나중에 열어보니 지푸라기에 들러붙은 곰팡이 때문에 콩이 발효됐단다). 『음식이 상식이다』의 책날개에는 '먹는 얘기는 언제나 즐거워'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먹는 것뿐 아니라 그 음식에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깃거리는 더 흥미롭고 즐거이 느껴진다. 얼마 전 한국의 라면 소비량이 세계 1위를 기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1인당 연간 라면 소비량이 76개라는 것. 라면? 당연히 이 책에서도 다룬다. 지금 우리가 먹는 인스턴트 라면의 원조는 50년대 후반 일본의 안도 모모후쿠라는 사람이(최초 개발자는 안도가 분명하나 라면 자체의 기원에 대해서만큼은 다종다양한 해석이 있다ㅡ심지어 '라멘'이라는 말의 어원까지도) 밀가루로 식품을 개발하던 중 포장마차에서 어묵에 밀가루를 발라 튀기는 것을 보고 착안했다고 한다. 당시엔 면 자체에 양념을 한 것이었는데 지금과 같이 분말 수프가 따로 나오게 된 건 그로부터 3년 후라고(한국에서는 1963년 삼양식품에서 처음 생산했다는데, 내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 학교에 바투 붙은 삼양라면 공장 굴뚝에서 늘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글을 읽다 곰곰 생각해보니, 라면을 처음 접하기 시작해서부터 지금껏 얼마나 많은 양을 먹어 왔는지는 도저히 가늠조차 되질 않는다(어젯밤에도 요깃거리로 컵라면 하나를 뚝딱 해치웠으니!).




무심코 베어 먹는 사과 한 쪽. 겉보기에는 단순한 사과지만, 역사와 연결해보면 철학적, 정치적, 과학적, 미학적으로 다양한 뜻이 숨어 있다. 뉴턴의 사과 (...) 이브의 사과 (...) 세잔이 그린 사과 정물 (...) 머리 위에 올려놓고 화살로 쏜 윌리엄 텔 (...) ‘내일 지구가 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 음식을 먹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 속에는 그보다 더 다채로운 이야기와 역사가 숨어 있다.


ㅡ 본문





그런데 어디 라면만 그럴까. 개인적으로 특히 면 요리를 좋아해서 어딜 가든지 즐겨 먹는데, 한때 일본에 장기간 체류했을 적에 덴푸라우동을 수차례 먹었던 적이 있다. 이 덴푸라(天婦羅)ㅡ튀김, 역시 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나온다. 그가 처음으로 생선(도미) 튀김을 먹어보곤 맛에 매력을 느껴 기름진 음식을 과식해 복통을 일으켰다는 덴푸라(일시적으로 건강을 회복했지만 결국 석 달 후 사망했다). 당시 튀김 요리에 쓰는 값비싼 참기름 탓에 극소수의 상류층만 즐겼다고 하는데, 16세기 일본에 들어온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전파했다는 게 일반적인 정설이다. 더군다나 덴푸라라는 말의 어원 또한 라틴어로, 튀김과 전혀 무관한 '사계절'이라는 의미라고 한다.(p.388) 가톨릭에는 사계절이 시작될 때 고기 대신 생선을 먹는 사계재일(四季齋日)이라는 것이 있다는데 바로 그 사계재일, '콰투오르 템포라(Quatuor Tempora)'에서 '템포라'가 '덴푸라'로……. 거 참, 늘 옆에 두고 먹는 소소한 음식 하나하나에도 별의별 역사와 이야기가 존재하는 걸 보면,ㅡ이 『음식이 상식이다』 개정판 첫머리에 적힌 것처럼 책은 소위 '맛집 정보'를 다루지는 않는다ㅡ무엇 하나 허투루 만들어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음식을 함께 먹는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분위기에서 먹었는지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저자의 말 역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역사와 문화가 섞인 다채로운 음식 이야기, 미처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사실들, 음식 잡학 사전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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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 희망과 회복력을 되찾기 위한 어느 불안증 환자의 지적 여정
스콧 스토셀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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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탱이 토악질을 하건 말건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거다. 그들 스스로가 참을 수 없는 불안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말이다. 나도 한때 조울증 비스름한 뭔가를 겪어본 적이 있는데 돌이켜보면 그리 심각한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아니면 순전히 내 착각에 의한 것이었을 수도). 내가 조울증을 앓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마저 당시 들었기 까닭인데, 정말로 나 자신이 양극성 기분 장애를 앓고 있었다면 그런 자각은 불가능했을 것만 같다. 여하튼 세계가 날로 달라지는 만큼 새로운 질병이나 장애도 매일매일 생겨난다. 육체적이든 비육체적이든 간에(불과 30년 전만 해도 불안이라는 병명은 존재하지 않았단다). 불안을 다루는 이 책에는 아주 간단하고 실생활에 밀접한 사례가 있다. 두려움이 설사를 일으킨다(두려운 감정이 배 속의 열을 높이므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 어마어마한 긴장 상태가 지속되면 나도 모르게 배탈이 난 것마냥 아파올 때가 있는데 아마도 그런 상황을 설명한 듯하다. 뭔가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는 사람에게 흔히 나타나는 모습이리라. 책은 물론 이보다 훨씬 심각해 보이는 사례들로 채워져 있는데, 어쩐지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는 문장 사이에 '불안과 함께'라는 말이 삽입되지 않으면 안 될는지도 모르겠다. 건강, 돈, 일, 죽음, 부상, 성격 등등 셀 수도 없이 불안과 공포증을 유발하는 걱정들이 우리로 하여금 전전긍긍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 일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는 하나 어디 그게 쉬 극복되랴(인간은 상상력 때문에 비겁해진다더니!). 애초 불안은 우리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발생할 텐데 말이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구태여 불안감을 자초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어떻게 해도 안 되는 일이라면 굳이 그 일에 이런저런 상상을 덧붙여 공포스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내 생각에 따라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일이 바뀔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심지어 아직 오지도 않은 두려움 때문에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뭐든지 적당하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특히 아직 닥쳐오지 않은 일로 인한) 불안에 대한 것만큼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실제로 책을 다 읽고도 불안증을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아직도 알쏭달쏭하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은 상당히 유효할 것이다. 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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