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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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다보면 유난히 마음 쓰이고,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사람이 한두 명은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와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감히 영초 언니에 비할 수 없지만)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하나 있다. 단지 저자와 내가 공통점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어렵고 힘든 시절은 있을진대 그 시절을 기꺼이 함께 가 준 사람이 꼭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되돌아 볼 때 마냥 힘들고 불행하지만은 않았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도 그런 시절과 사람이 있었다. 매번 고딩 조무래기들과 연극을 하다 몇년 후 제법 갖춰진 곳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수를 만났다. 한때 연극이 좋아 배우로도 활동했었지만 뭐 때문인지 연극판을 완전히 떠났으며 팀 내에서도 그리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했다. 나 보다 세 살이 어렸지만 언니, 언니 하면서 잘 따랐던 후배다. 나는 다소의 낯가림이 있어 평소 그리 살갑게 대해주지도 못했다.

 

갖춰진 곳이니 나에겐 더 잘된 일이긴 한데 그것도 잠시, 왜 난 그곳이 그리도 부담스럽고 외로워했는지 모르겠다. 지나놓고 보면 다 미숙하고 지혜롭지 못해 그런 것이긴 하지만 당시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것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왜 이 일을 한다고 했을까? 마음 고생도 많이 하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럴 때마다 수는 내 아픔이 자신의 아픔인 양 같이 울어주고 아파해 줬다.

 

하지만 스타일도 성향도 서로 달라 우린 결정적일 때 불화했고, 생채기도 많이 냈다. 세상에 처음부터 마음에 맞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서로 맞춰 가는 거지. 그게 이론적으론 가능한데 막상 부딪쳐 보면 생각만큼 되질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 한 번 크게 싸우고 다시 안 볼 생각도 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또 그런 것이 아니라 다시 화해하고 한동안은 잘 지냈다.

 

모든 것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고 그도 몇 년을 하고나니 팀의 존폐설이 제기 되었고, 결국 팀을 정리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때 나는 그것에 단 1의 아쉬움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다렸다고나 할까? 팀이 해체되면 다시는 돌아보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수 역시 별로 아쉬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싸늘하더니 팀이 완전히 정리가 되자 마치 대인기피증에라도 걸린 사람마냥 숨어버렸다.

 

나는 수가 그렇게 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우린 팀이 해체가 되더라도 서로 연락하고 가끔 밥도 같이 먹으며 옛 추억을 곱씹게 될 줄 알았다. 그러다 거의 1년 반만이던가? 어떤 일이 있어 다시 만났는데 옛날의 수가 아니었다. 뭔지 모르게 막이 쳐져있었고 불편해하는 모습이 영력했다. 나 역시 그렇게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그런 그녀에게 따뜻하게 대해 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때 이후 지금까지 우린 다시 만나지 못했다.

 

사람이 잊히는 거야 당연하지만 그런 식으로 헤어지니 더 많이 기억에 남더라. 그리도 살갑고, 열정적이었는데 그녀가 마치 하루아침에 병든 사람처럼 바뀐 것을 도무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동안 그렇게 안으로 곪아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때 그녀는 팀을 더 이어갈 마음이 있었던 걸까? 그런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나에게 화살을 돌려댔던 걸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지만 그래도 그때를 되돌아보면 수만큼 나를 이해하려고 했던 사람은 없었고, 연극판의 그 치열한 여정을 함께 견뎠던 사람도 없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생각나는 사람이다.

이 책을 보며 난 그때의 수가 아스라이 떠오르는 것이다.

 

저자는 어떻게 그 오랜 세월 이 이야기를 가슴에만 묻어놓고 살았을까?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자서전을 쓰고 싶어지는 법인데 저자는 참으로 오랫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꽁꽁 묻어놨겠구나 싶다. 더구나 저자는 언론인 출신이다. 온갖 사건과 사고, 남의 이야기는 발 빠르게 취재하고 썼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이렇게 말하지 않은 걸 보면 그 시절에 대한, 또 영초 언니에 대한 빚진 마음이 어느 정돈지 알 것도 같다.

 

덕분에 우린 민주와 항쟁, 그 뜨거웠던 시절을 다시 한 번 만나게 됐다. 어느 한쪽에서는 또 옛날 고리짝 이야기를 곱씹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시절 민주화 투사들과 독재 정권에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선량한 시민들의 가슴에 또 한 번 못을 박는 일이 될 것이다.

 

아직도 민주화 운동 진상이 규명되지 않았다. 아직도 친일 세력을 비롯한 일부 보수 세력이 이것을 자꾸 덮으려고만 한다. 그래도 정권이 바뀌긴 바뀌었나 보다. 지난 박근혜 정권과 보수 세력은 할 수만 있으면 죽은 박정희의 망령을 다시 살려 내려고 안달이었는데 정권이 바뀌고 보니 해결하지 못한 민주화 운동의 진상을 규명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나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진상은 반드시 규명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 이 책이 그저 한낱 개인의 과거사에 대한 한풀이나 하자고 쓰인 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여성인 만큼 그 시절 여성들이 어떻게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어떻게 고문과 학대를 받아왔는가를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어 그 시대를 규명하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좀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 역시 박정희 키즈로 자라왔고, 그가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계기로 민주화 운동은 일어났다고 생각했었다. 솔직히 그때까지 그를 대신할 사람이 있었을까?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을 보고 난 그때야 비로소 나의 믿음을 의심했고, 박정희를 의심했다. 그도 죽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 권력은 남용되어선 안 되겠지만 장기적으로 이어져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것을 그제야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전후 사정을 몰라서 그렇지 우리나라의 민주화 열망은 그 보다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저자도 말하지 않는가? 우린 그저 박정희가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오길 바랐지 그렇게 허망하게 죽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고. 그 덕분에 교도소에서 나올 수 있었고, 제적당했던 학생의 신분을 다시 회복할 수도 있었으며, 소위 말하는 서울의 봄을 맞이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연 국가가 그들에게 입힌 폭력과 상처는 보상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물론 그들이 어떠한 보상을 바라고 투사의 길에 뛰어 들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또 그 덕분에 어느 정도 민주화는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피기도 전에 시들어져 가는 꽃이 됐던 건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가 언제 독립투사를 제대로 대우한 적이 있던가? 친일파의 후손들은 여전히 저렇게 건재한데, 국가 유공자란 명예는 주면서 그들이 정작 어떻게 사는지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런 것처럼 민주화 투사들 역시 나 몰라라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우리나라처럼 사관이 좁은 나라도 흔치 않은 것 같다. 모 아니면 도다.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됐다는 건 또 한 번 역사를 후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지 않는가?

 

무엇이 그토록 역사의 망령을 놔주지 못하는 걸까? 그걸 단순히 향수라고 말해도 좋은 걸까? 새 역사, 새 역사 하지만 우린 아직 새 역사의 주인이 될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굳이 가보지 않아도 되는 길을 돌아 가보고 그 끝에 닿아봐야 깨닫는 우리 민족은 그다지 지혜로워 보이지 않는다. 미래지향적이지 못하고 과거 지향적이며, 진취적이지 못하고, 현실 타협적이며 안정만을 지향하는 그것이 발목을 잡아 온 것은 아닌가?

 

민주화를 외쳤던 사람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피해를 입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했다. 사람들이 억압 받고, 피 흘리고 있는데 그것을 어찌 나 몰라라 할 수 있겠는가? 짐승도 그렇게 안한다. 돕는 사람을 핍박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정말로 잘못된 사회다. 이런 사회의 미래가 어떨지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런 사회에 내 자식을 맡길 수 없어 그토록 분노했던 것이 아닌가?

 

그나마 정권이 바뀌니 진상 규명이라도 한다지. 앞으로 또 정권이 바뀌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더 많이 발굴하고, 제시하고, 증명되었으면 좋겠다. 말했다시피 우리나라는 역사를 보는 스펙트럼이 넓지가 못하니 또 언제 잠자고 있는 역사의 망령이 나와 그것을 잡아먹고 흐려 놓을지 알 수가 없다.

 

영초 언니가 그리된 건 정말 다시 생각해도 마음 아픈 일이다.

그리도 민주화를 열망했던 그녀였지만 이 나라에서 내 아이를 온전히 키울 자신이 없어 이민까지 불사했건만 그것이 죄였을까? 그녀가 캐나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렇게 민주화를 위해 몸을 던졌으니 이제 행복해도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그녀에겐 조금치의 행복도 허락되지 않았던 걸까?

 

그런데 또 영초 언니를 생각하면 그게 어디 저자 개인만이 아는 언니였을까 싶기도 하다. 우리는 얼마나 민주화 운동을 하다 상처 받은 사람들을 보듬었을까? 사랑했을까? 언제나 그렇지만 생은 내 편인 적이 없다. 과연 영초 언니가 그리된 것이 그 언니 개인만의 불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의 생은 그녀의 편이 아니어도 우리는 그녀 편이 되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저자는 한 개인의 체험으로서 그 시절을 얘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고, 마치 우리에게 이런 사람을 알고 있노라고 소개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린 영초 언니를 어떻게 해야 할까? 2, 3의 천영초가 또 있지 않을까? 나라를 위해 옳은 일을 하고 상처 받고 쓰러진 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다.

 

모르긴 해도 저자는 영초 언니에 대한 어떤 부채 의식 때문에 이 글을 썼을 것이다. 한때는 함께 민주화의 험한 강을 건넜던 사람. 그런데 또 필요에 의해 그를 멀리했다. 또한 그것이 언니를 그리 만들었을까 죄책감도 있었으리라. 무엇이 영초 언니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 읽는 나도 마음이 착잡했다.

 

이 책은 영초 언니에 대한 저자의 참회록이자, 민주화 운동의 여성사이기도 하며, 한때 뜨거웠던 열망의 비망록이기도 하다. 꼭 한 번 읽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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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7-09-27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일의 잔재를 뿌리뽑지 못한 역사가
한스럽네요
그들이 살아남기위해 공산당 때려잡는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것이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2016년, 휘날리는 태극기로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줬지 않나 싶습니다.

stella.K 2017-09-28 14:5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우리나라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이 과거사 진상 규명이지 우린 해결할 의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제 쿨까당 잠깐 보니까 전두환이 비자금만 1조라더군요.
최근까지 했던 국회의장이 전두환 끄나풀이었다는데
누굴 말하는 건지 가물가물하더군요.
아무튼 그만큼 아직까지도 정치계에 줄을 대고 있다는 거죠.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요.

2017-09-27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8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9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27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 책을 읽으면서 궁금한 점 하나 생겼어요. 천영초 님의 과거 모습이 있는 사진을 단 한 장이라도 실려 있지 않았을까요? 사진도 역사가 되는 기록인데 말이죠.

stella.K 2017-09-28 14:46   좋아요 0 | URL
그러게. 그게 좀 실렸으면 좋았을텐데...
근데 그러면 오히려 작가의 자서전 같은 분위기가 나서일까?
아니면 그 부분은 비밀로 하고 싶었나 보지.
아무튼 좀 그분은 정말 안타까웠어.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ㅠ

2017-09-27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8 1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8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