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소설의 위기] "한국 소설 '상상의 날개' 맘껏 펼쳐라"
개인의 일상 ·내면세계 좁히는 작은 이야기만으론 한계

▲ 한 대형서점에서 소설책을 읽고 있는 여성
허황하지 않은 미래 예측이 있을까? 미래 예측은 그것이 현실화하지 못해 허황해지기도 하지만, 당시 통념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 허황한 것으로 취급 당하기도 한다. 소설에 대한 예측 또한 미래 예측의 일반적인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어 보인다.

그래도 예측이란 것을 해봐야 한다면, 나는 우리 한국 소설이라고 해서 ‘우리 한국’의 관점과 배경에서만 그 앞날을 예측하려는 것은 착오라는 점을 먼저 강조해야겠다. 1980년대 한국 소설, 혹은 1990년대 한국 소설을 전망하는 자리라면 또 모른다. 지금은 서사(이야기) 장르의 변화 과정 가운데서 소설의 앞날을 내다봐야 할 때가 아닌가?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세상을 재현하는 문화 양식이 이야기이고, 이야기 욕망이 인류에게서 소멸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렇지만 소설이 변함없이 인류에게 필요하며 또 영광을 누리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 역할과 영광을 다른 이야기 장르가 맡고 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서사 장르의 역사에서 소설은 근대사회를 배경으로 하여 인쇄술의 도움을 받아 탄생했다. 사회의 보편적 가치 질서를 부정하는 문제적 주인공을 내세워 진정한 가치의 부재를 고발하고 은연중 그것을 희구하게 한다는 점에서 시대와 불화하는 장르라는 인식이 깊다. 하지만 소설이 근대사회로부터 온갖 후원을 받아 영광을 누렸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중세의 로망스(용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하는 식의 기사 연애담)와는 달리 구체적 일상세계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는 대중적 문학형식으로 출발해 19세기에는 사회학, 또 20세기에는 심리학을 통해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 왔으며, 그러는 중에 소설은 고급문학이 되지 않았는가.

그런 어느 순간이었던가? 다른 이야기 장르가 등장해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 시작했는데, 영상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새로우면서도 어느새 익숙해진 장르로부터 소설이 대중을 되찾아오기는 힘들 것이다. 대중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시도되고 그래서 밀리언셀러가 다시 나오거나 우리 사회에 영향력 있는 발언권을 가진 작가가 문득 나오기도 하겠지만, 대중은 대중이어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좀더 적합한 쪽을 선택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근원적인 역전은 불가능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해도 좋다.

아마도 서사 장르의 역사는 영상(현재 시청각)을 중심으로 한 재현을 넘어서서 오감(五感) 전체를 재현해내는 가상현실(시뮬레이션) 같은 쪽으로 펼쳐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사 장르의 중심이 옮겨가는데도 소설이 이야기 장르로서 계속 생산·유통될 수 있을까? 소설을 읽고 쓰고 함으로써 형성되는 ‘소설 공동체’가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문학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식의 보조 혹은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까? 자칫하면 현재의 지원 방식이 소설을 간신히 연명하는 이야기 장르로 만들고 결국에는 박물관에 밀어 넣게 될지 모른다. 활로를 모색하는 동안 외부의 지원도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우리 삶의 무대가 전지구화하고 테크놀러지의 위력이 날로 더해지는 상황에 대응할 만한 상상력의 개발은 포기하고 안주하도록, 혹은 이즈음 만연한 개인의 일상과 내면세계로 좁혀 들어가는 작은 이야기만이 그래도 살 길이라고 하는 퇴행적 의식을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작가로서 나는 한때 영광을 주었으나 이제는 치욕을 주고 있는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에 소설이 투정부리는 식이 아니라, 제대로 도전하면서 새로운 대중을 출현시키고 그들과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본다. 더불어 그 동안 소설이 근대사회와 한몸이 되어 배척했던 것들에 화해의 손을 내밀면 원군이 되어 주리라는 기대도 하면서.


구광본 문학평론가· ‘소설의 미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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