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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을 잃은 반려인을 위한 안내서
켄 돌란-델 베치오.낸시 색스턴-로페즈 지음, 이지애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7년 5월
평점 :
의도했던 건지는 모르겠는데, 책이 작고 얇기도 해서 귀여운 애완견을 연상하게 만든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반려동물을 잃으면 어떻게 하라고 조언해 주는 책인데 나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어 참고해 볼만하다.
미국엔 펫로스 상담사가 있는가 보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에도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다. 얼마 전 반려견을 산책을 시켜주는 트레이너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말이다. 애견 미용실은 물론이고, 카페나 호텔, 유치원이 있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이렇게 반려동물 산업은 나날이 증가 추세라고 하는데 정작 그것을 키웠던 사람을 위한 일은 얼마나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글쎄, 우리나라는 보수적인 사고방식이 있어서일까? 반려동물 천만 시대라고는 하지만 위에서 말한 시설을 얼마나 이용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반려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진정한 의미에서 반려로 생각하고 동물들을 키우고 있는 걸까 의문스럽기도 하다. 미국처럼 개에게도 재산을 상속해 줄 수 있는 정도가 돼야 진정한 반려가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반려라기 보단 그냥 재산 가치 목록 중 하나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펫로스 증후군이 있다고 한다. 단어가 주는 의미가 어렵지 않게 파악되듯 반려동물을 잃고 상심한 마음을 일컫는 말이다. 물론 그것은 육체의 반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가족이나 친구를 잃고 겪는 애도 반응과 같아 우울감, 불면, 식욕부진 같은 증상이 2주 이상 지속되면 의사나 전문 상담사의 도움을 받으라고 권한다.
실제로 사람과의 사별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상담을 받는 경우는 있을 수 있으나 동물을 잃었다고 상담이 필요하다면 이것에 얼마나 수긍할 수 싶기도 하다. 예전에 집에서 키우던 개는 마당에서만 키우고, 유사시 잡아먹을 수도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펫로스 증후군을 쉽게 무시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모르긴 해도 펫로스 증후군은 반려동물 산업이 증가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사안이 될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동물에 대한 보수적인 사고방식이 팽배해 있는 것만큼이나 동물에 (때로 과도하게) 집착을 보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는 이유에 대해 정확히 따져봐야겠지만, 그런 사람의 적지 않은 수가 사람에 대한 상처나 사귀는데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반려동물(이 경우 주로 개나 고양이가 되겠지만)은 상처를 주지 않으며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세상에 대해 마음에 문을 닫은 사람이 마지막 출구로 그런 양태를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에게도 어느 날 반려견 또는 반려묘와의 마지막이 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랬을 때 그들의 겪어야 할 마음의 상심이 어떨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뿐인가? 그들을 여러 목적으로 사용했을 경우 예를 들면, 자폐나 치매 등 치료 목적이나 소방이나 경찰업무 등에 가담시켰다 사고사 내지는 자연사 하는 것을 지켜봐야 할 때 사람은 펫로스 증후군을 겪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들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경우 부모의 돌봄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어떻게 펫로스 상담을 무시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들은 또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위에서 열거한 정신적이며 육체적 증상 때문에 병원을 가야겠지만 우리나라는 역시 보수적이어서 가기를 꺼려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설혹 간다고 해도 펫로스 전문 진료를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고.
그런데 이 책을 보며 한 가지 더 느꼈던 건, 반려동물 산업이 확산되는 것만큼 과연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반려동물을 사랑했을까를 되돌아보게도 된다. 우리가 죽음을 목도한다는 건 그 당장은 슬픈 일이긴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삶을 한층 더 깊고 성숙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무조건 죽음을 거부한다고 해서 죽음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비롯해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다 끝이 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사랑해야 한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우린 그것에 훨씬 못 미치는 사랑을 한다해도 말이다.
어떤 유명한 명사가 그런 말을 했다. 우리는 반려견의 건강을 위해 하루에 얼마 정도의 산책을 시킨다. 그런데 그 시간이 반려견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주인이 정한 시간일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반려견의 입장에서 볼 때 어느 날은 20분이 걸릴 수도 있고, 어느 날은 40분이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개가 원하는 만큼의 산책을 시켜줘야 하는데 우리는 20분이 좋다고 해서 무조건 20분만 산책을 시키려고 한다면 그건 반려견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우리 인간은 뭐든지 지배하고 다스리려고 한다. 좀 격하게 말해서 펫로스 상담 이게 과연 필요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가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 슬픔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버티는 사람이 있다. 그게 진정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인가 의문을 가져 보게 된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미성숙한 것이며,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죽은 망자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물론 그를 추억하는 거야 나쁜 일이 아니겠지만 언제까지고 슬픔에 빠져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니다. 망자에게도 잊힐 권리라는 게 있다. 그런 것처럼 동물도 마찬가지다. 동물에게도 삶이 있는 것처럼 죽음이 있다.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못해 언제까지나 슬퍼한다면 그건 또 얼마나 민망한 일이 되겠는가.
사랑한다면 상대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대의 눈높이가 돼서 바라봐 줘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상대를 내 눈높이에 맞추려고 한다. 동물조차도 말이다.
펫로스에 관해서라면 나 역시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15년 키운 말티즈 제니가 드디어 마지막을 고하려 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언제 죽을까 병색이 완연했는데 그날은 옛날 건강했을 때의 모습을 거의 회복한 듯 했다. 눈도 초롱초롱하고 발에도 힘이 생겨 실내를 뛰어다닐 정도였다. 한동안 내 방에 와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다. 바로 그때 난 녀석의 죽음을 직감했었다. 넌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구나. 그리고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구나.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런지 하룬가 이틀 만에 녀석은 아무도 지켜보지 않던 새벽에 홀연히 생을 마감했다. 아마도 주인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한 마리 개도 사람을 위할 줄 아는데 하물며 사람이 죽은 반려동물을 놔줄 수 없다면 부끄러운 일 아닐까? 죽음이란 자연에서 왔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거라지 않은가?
책에 보면 이제 막 펫로스가 된 사람에게 금기 사항이 있다. 이를테면 반려견은 또 데리고 오면 되는 것 아니냐 하며 섣불리 슬픔을 위로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고 존재는 유일한 거니까. 하지만 반려동물은 우리가 돌봐줘야 할 작고 연약한 존재들이다. 기왕 돌봐왔다면 또 돌보게 해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도 자식을 잃으면 다신 안 낳을 것 같지만 또 낳아 키우면서 슬픔을 잊기도 하지 않는가?
정말로 금기사항이 있다면 이것이다. 이미 죽은 반려동물을 박제로 만드는 것. 우리가 정말 사랑했다면 그 짓마는 하지 않기로 하자. 말했지만 사람에게도 잊힐 권리가 있는 것처럼 동물도 잊힐 권리가 있다. 또 하나 금기사항이 있다면 그건 학대하는 것, 키우다 버리는 것 아니겠는가.
책은 아픔을 나누는 방법을 적극 활용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슬픔을 나누고 정신적인 지지를 받으라고 한다. 또 그러다 보면 어느새 위로자가 되기도 한다.
책은 이 분야에 대한 소개 정도여서 좀 아쉽긴 한데 한번쯤 읽어 볼만하다. 우리가 반려동물을 정말 성숙한 태도로 키운다면 펫로스 상담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로선 이것은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