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기생뎐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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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질투는 나의 힘>이란 영화를 본적이 있다. 거기서 보면, 배우 문성근 씨가 모 문학잡지사 편집장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가 박해일에게 그런 말을 한다. 자신도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될 수 없다고. 그건 자기 안에 한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내 안에 은근한 부아가 치밀었다. 시나리오 작가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문성근의 입을 빌어 썰을 풀어대는군 하며 심사가 비틀렸다. 하지만 다른 누구라면 모르겠는데, 문성근이 그렇게 말하니 리얼리티가 살아있어 반박을 할 수가 없다. 너무 실감나게 연기를 해서 정말 그가 작가가 되지 못한 게 치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반박해 본다. '한이 없다고 작가가 못되나? 그 나름의 수준에 맞는 작가가 되면 되는 거지. 일류면 일류답게, 이류면 이류답게, 삼류면 삼류답게 작가하면 되는 거잖아!'

난, 한이 있느니 없느니 하며 자기가 하고 싶고 되고 싶은 일을 이루지 못한 것에 열패감을 표현한다는 것은좀 바보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한'이란 게 뭔가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았다.  

사실 이 한(恨)이란 우리나라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정서로써 영어 어떤 단어에서도 이것을 대신 할만한 적절한 표현방법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어설픈대로 이 '한'을 대치할만한 단어는 뭐가 있을까? '열등감' 플러스 '우울함' 플러스 '~~에로의 승화' 뭐 이렇게 표현하면 얼추 되는 건 아닐까?

요컨대 나는 이 책에서 작가가 포착하려 하고자 하는 '한'의 정서를 따라가고 싶었다. 지금도 생생히 영상처럼 기억에 남는 것은, 이 시대 마지막 기생이 될지도 모를 미스 민이 화초머리를 올리는 그날 밤 추었다던 춤에서 한을 보았다.(본문 104~105). 가난이 싫고, 국악에서 인간문화재 전수자가될 자신이 없어서 부용각으로 들어선 나끝순. 그녀는 거기서 미스 민이란 새 이름을 얻고, 자신의 귀밑머리를 풀어 줄 손님 앞에서 춤을 춤으로 자신의 한을 그렇게 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상징적으로 와 닿았다. 그녀의 춤사위는 과연 어땠을까?

그렇게 한을 가진 인물이 미스 민 하나였겠는가? 부용각의 주인인 타박네는 어떻고? 오마담은? 하다못해 오마담의 기둥서방은? 오마담을 먼 발치에서 연모하는 부용각 집사는 또 어떠랴? 그들은 하나 같이 자신이 자신답지 못해서,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가난 때문에, 타고난 팔자 때문에 부용각에 스며들었고, 부용각을 떠나지 못한다.

이 '한'은 소외된 사람에게서나 표현되어지지 주류인에게서는 다루어지지 않는다. '한'은 짓밟혀진 감정이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것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것으로서 잡초같은 것이고, 동시에 성숙하고 희망적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한'이 잡초 같다고 하여 '신화' 꿈꾸지는 않는다. 그냥 올곧을 뿐이라고 해야할까? 홀로 핀 해어화처럼?

이 '한'이 비교적 젊다고 하는 미스 민에게서도 보여지고 있다면, 오늘 날에도 이어져 오는 정서일까? 왠지 그것에 쉽게 긍정할 수가 없다. 이것은 우리 서민에게서 보여짐직한데, 그들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렇다고 인내가 있어 잡초처럼 버티기를 해 보겠는가? 그저 조금만 수틀리면 불 싸지르고 동반자살을 하지 않는가. 아니면 그들의 울분 때문에 불특정다수를 표적으로하여 복수 아닌 복수를 하지 않는가.

우리나라가 '한'이라고 하는 정서만 고스란히 가지고 있어도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을 높은 자존심을 갖게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가 음주가무에 뛰어났던 건 바로 이 '한'이란 정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극히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도 바로 이 이유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픔이 없는 사람 보다 있는 사람이 사랑스럽다는 것도 또 그렇게 봐 줄 수 있는 것도 알고 보면 '한'을 알기이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상처있는 사람끼리 보듬어 안아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영화 <질투는 나의 힘>에서 문성근이 말했던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작가는 과연 문성근이 말했던 '한'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이 '한'이라는 정서가 뭔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작가의 문체는 아름답고 농염하다. 그리고 등장인물은 처연하다. 절대로 요즘 작가들에게서 보여지는 경쾌하고 스피디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 마치 한지에 그린 그림처럼 선명하고 단아하며 그 안에 정염을 내포하고 있다. 아, 어떻게 하면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단말인가? 가히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래. 꼭 '한'을 말하지 않아도 작가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작가가 되고 싶다면 '한'을 마주하고, '한'에 도전하고, '한'을 풀어헤쳐봐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난 쉽게 읽혀지지 않은 이 작품을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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