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책과 램프사이] 정직한 회상의 힘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

 

밀도가 높은 문장을 읽고 싶을 때면 이성복의 산문집과 프랑소와 트뤼포의 영화들 그리고 아니 에르노의 소설들을 찾아 읽는다. ‘단순한 열정’이나 ‘아버지의 자리’도 좋지만, 내 손가락이 마지막으로 가 닿는 책의 제목은 ‘부끄러움’(열림원)이다.

스토리 창작 강의 첫 시간, 자신의 삶에서 가장 부끄러운 순간을 적어오라는 숙제를 내곤 한다.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숙제를 제출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교수나 동급생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끄러운 순간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성경 구절 비슷한 문장을 들려준다. “작가가 발가벗지 않고 어떻게 등장인물을 발가벗길 수 있으며, 작가가 죽지 않고 어떻게 등장인물만 죽일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얇은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꼭 읽어보라고 권한다. 좋은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것은 화려한 손놀림이나 명석한 두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임을 ‘부끄러움’은 단숨에 보여준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넘었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 했다”로 소설을 시작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우리는 그녀가 못할 말이 없음을 알게 되고 과연 무슨 장면까지 쏟아놓을까 궁금해진다.

평생 감추고픈 치욕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망각하거나 외면하거나 도피하는 방식으로 그 날 그 사건과 다시 부딪히려고 하지 않는다. 고통의 핵심으로부터 비켜서서 종교나 도덕 혹은 가족애에 의지한다.

그 사건을 겪은 아니 에르노에게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존재의 모든 것이 ‘부끄러움의 표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 상황은 그녀를 절망의 나락으로 이끈다. 그녀는 고백한다. “나에겐 어떤 일이건 일어날 수 있고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며, 부끄러움 뒤에는 오직 부끄러움만 따를 것이란 느낌.” 이 느낌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녀가 택한 것은 글쓰기다. 글쓰기가 어떻게 몸에 배인 부끄러움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또 하나의 가면이나 방패가 아닐까.

정직은 용기다. 그녀의 글쓰기는 망각과 외면, 도피로 얼룩진 기억들을 날카롭게 반성하면서, 자기 합리화의 지점들을 하나씩 짚어나간다. 아니 에르노는 주장한다. “회상도 하나의 체험이다.” 그녀는 과거의 감각을 일깨우는 섬세한 글쓰기를 통해, 어린 시절 겪은 충격적인 사건을 새롭게 체험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부끄러움의 탑이자 치유의 탑이다.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졌을까. 독자들이 이 작은 책을 읽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너그럽게 바라보고 용서하게 된다면, 아니 에르노의 노력은 헛되지 않으리라. 독자의 고통을 치유함으로써 자신의 구원까지 얻는 자, 그가 바로 작가이다.

김탁환 소설가·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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