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채널 예스'(인터넷 서점 예스24에서 만드는 무가지 잡지) 9월호는 요즘 한창 핫한 장강명 작가를 특집으로 다뤘다. 거기에 최근 나온 <5년만의 신혼여행>이 언급되기도 했는데, 나는 아직 읽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나' 싶은 내용들도 많이 나온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구미가 당기기도 한다.

암튼 그것을 읽으니 지난번 나의 책을 낼 때 나는 과연 얼마나 솔직했는가를 돌아보게 되고, 이 '솔직해 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물론 나는 매번 글을 쓸 때 솔직하게 쓰려고 했고, 결국 그 글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나온 것이긴 하지만, 특별히 나는 '작가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독서 에세이'란 부제가 좀 부담스러웠다(이것은 내가 정한 부제는 아니다).   

나는 아직 작가라 불리기에도 부족하고, 그렇다고 꿈만 꾸기엔 어딘가 모르게 나의 정체가 모호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내 책의 글은 그저 나의 고백을 담으려 했을 뿐인데, 부제를 그렇게 부쳐버리니 마치 작가 지망생들을 겨냥한 것이 되어버렸고, 과연 나도 같은 꿈을 꾸면서 그들에게 알려줄 말이라도 있었던 걸까 반문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난 작가라면 작가 일수도 있다. 오래도록 대본을 써 왔고, 그에 대한 합당한 원고료도 받아 왔으며, 오랜 인고의 세월 끝에 책도 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서 원고료 줄게 글 써 달라는 곳도 없고, 후속작을 계획 중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공백기에도 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뭐 우기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10년 전 또는 20년 전에 책을 한 번 내고 작가라고 하는 사람도 많을 테니. 하지만 과연 그런 사람에게도 작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작가였었었대. 과거형으로 쓸 수는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그 책이 몇 년 만에 한 권씩이라도 팔린다면 작가의 명망은 유지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독자들조차 그런 책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작가라 불리는 건 고려해 봐야 하는 것은 아닐지. 하지만 알 사람은 안다. 작가는 현업보단 명예에 가깝다는걸.      

무엇보다 한 권의 책이 아니 그전에 한 편의 글(그것이 단편이든, 장편이든, 소설이든, 에세이든 기타 등등의 글)이 누군가의 눈에 띄어서(뭐 주로 출판 쪽에 관계된 사람들이겠지) 한 권의 책으로 나온다는 건 로또나 벼락 맞을 확률에 비견된다는 걸 지난날 우리가 아는 명작들이 증명해 주지 있지 않는가. 물론 그나마 늦게라도 빛을 봐 대박신화를 썼으니 좋은 일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 사실 때문에 더 자괴감을 느끼고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영혼도 있을 것이다그러니 자비 출판을 하기 전에 내가 지금 쓰는 글이 활자화될 거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지금은 세월이 많이 좋아져 자비출판도 한다지만, 소소하게 지인들과 나눌 목적이 아니면 그것도 그렇게 의미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장강명 작가는 채널예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어디는 지면이 없다고 하고, 어디는 작가가 없다고 한다고 했다. 이럴 때 나올 수 있는 말이 홍수 중 가뭄이란 말이던가? 어쨌거나 불균형이다.

내 책에서도 인용했지만, 천명관 작가는 평론가와 각종 문학상 심사위원의 작가에 대한 지도편달을 금하고, 먹고 살 수 있는 판을 새로 짜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글을 읽는 순간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그것에 공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공감만 할 뿐 판은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해선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그건 역시 문학인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데 이것에 변화를 주도하는 작가가 있으니 바로 장강명 작가라는 것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책을 낼 때는 기획서를 만들어 출판사에 보내기도 한다. 그렇게 평론가와 심사위원의 지도편달이 가능한 체제라는 건, 작가가 그것을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원했기 때문에 가능한 체제이기도 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론가나 심사위원 눈에 들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 가운데 장강명의 행보는 평론가를 의식하지 않고 출판사와 직접 협약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신선한 발상이고, 긍정적이기까지 하다. 기획서를 출판사에 보내 본다니.

그런데 사실은 난 이런 장강명 작가의 행보가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다. 내 책

을 출간한 출판사가 그랬으니까. 출판을 제안받고 2년 만이 이것을 수락했을 때 출판사로부터 가장 먼저 받은 미션은 바로 그 기획서였다. 그러니까 무엇을 독자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영화로 치면 일종의 시놉시스? 아니 일종의 피팅 같은 거였다.

피팅이 뭐냐고? 수년 전 내가 시나리오 학원을 다녔을 때 안 것인데, 말하자면 자신이 시나리오 작가라고 생각하고, 영화 관계자들에게 5분 이내에 자기 작품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실제로 그것을 실습해 보기도 했는데, 그건 미국같이 시스템이 잘 된 나라나 가능한 것이고, 우리나라에선 별로 해당 사항이 없다고 해서 허탈했었다. 물론 난 그런 건 하지도 않았다. 수강 일수나 채우러 나간 내가 무슨 피팅이겠는가. 더구나 무대 울렁증이 있는데. 일찌감치 시나리오 작가의 꿈을 접을 것을 그때만큼 잘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감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을 그때 선생님은 왜 시켰던 걸까?

 

비록 영화가 아닌 문학이고, 실제가 아닌 서면이긴 하지만. 그때 난 처음엔 좀 당황하긴 했다. 작가가 이런 것도 해야 하나? 시키는 것이니 해서 출판사에 보냈다. 그러면서 이 일은 꼭 출판사가 먼저 하라고 해서 할 것은 아니지 않을까? 작가가 먼저 작성해서 출판사에 보내 볼 수도 있지 않을까를 생각했고, 바로 장강명 작가가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작가도 평론가나 심사위원 뒤에 숨어서 그들이 깔아주는 판에서만 놀지 말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 계획서를 출판사에 들이미는 일이 흔해져야겠다. 물론 이것을 에이전시가 해 주면 좋겠지만 우리나라에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던가? 그러니 작가가 그렇게 직접 뛰어 보는 것이다. 

장강명은 말한다. 그 원고 청탁 꼭 받아야만 하는 것이냐고. 자신은 어쨌든 열심히 써서 여기저기 보낸다고 한다. 물론 그럴 경우 대부분은 생각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던가 아니면 그도 없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글쎄, 그게 작가가 등단 초기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최근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인지 확실히는 알 수가 없다. 이제 어느 출판사에서 감히 장강명 작가의 글을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겠는가.

그 글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 알려진 원로 작가들을 생각해 봤다. 이를테면 김홍신이나, 박범신 또는 김훈이나 황석영 같은 작가들 말이다. 그들이 처음부터 그런 대작가의 반열에 들을 것을 알고 첫 작품을 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첫 작품으로부터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얻었음은 분명하다. 글 써서 밥은 벌어먹겠냐 이런 의문과 푸념 섞인 말은 하지 말자. 그런 말을 하는 순간 지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작가들 말도 참 잘 지어낸다. 정지돈이 '후장사실주의'를 얘기하더니 장강명은 '월급사실주의'를 말한다.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뭔지 충분히 유추가 가능할 것 같아 장 작가의 말을 따로 인용하지는 않겠다. 뭐 작가들도 정자세로 앉아 글만 쓰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말을 문자화해서 벌어먹고 사는 직업이니 그런 말의 유희도 즐길 줄 알아야 할 것도 같다. 누가 알겠는가 이것이 앞으로 한 세대가 지나면 실제로 하나의 문예사조로 남을지. 하지만 정지돈의 '후장사실주의'는 솔직히 박민규 식 표현을 하자면 '조까라 마이싱'이다. 글 써서 밥 벌어먹겠다는 사람 쪽박을 찰 생각은 없지만, 그런 말장난이나 하면서 소설도 아니고, 서평도 아닌 이상한 글 쓰면서 작가 행세하는 작가에게 어떤 글을 쓰는 작가이고 싶은지 묻고 싶다. 내가 볼 때 정지돈은 소설을 쓸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쓰겠다고 한다면 난 여전히  독자로서 가차없어지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난 그런 작가에게 캐롤 오츠가 <작가의 신념>에서 했다던 유명한 말을 해 주고 싶다.  "문학에 예술만 있고 기술이 없다면 개인적인 일일뿐이다. 반면에 기술과 예술이 없다면 그것은 밥벌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글 쓰는 작가가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둘 중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데 이것을 다 갖추고 글을 쓰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그런데 이 둘을 갖추려면 돌아가신 이윤기 님 말씀 말마따나, 거울이 어떠네, 저떠네 잔말하지 말고 쓰라고 하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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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6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6-10-17 13:31   좋아요 1 | URL
그렇죠. 근데 기왕이면 도리를 다하는 작가였으면 좋겠다는 거죠.ㅎ

hnine 2016-10-17 0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고민을 하시니 stella님 작가 맞으시네요 ^^
저는 장강명 작가의 책을 단 한권도 안 읽은 사람으로서 잘은 모르겠지만 저런 배짱은 최소한 그는 생계를 온전히 책임지고 있는 생계형 작가는 아니지 않을까? 추측만 해볼 뿐입니다. 글써서 밥 벌어먹고 살아야 한다는 상황이 작가에게 어떤 때는 독으로도 작용하지만 또 어떤 때는 그것만큼 절실한게 없으니 약으로도 작용하는 것 같아요.

stella.K 2016-10-17 13:36   좋아요 0 | URL
생계형 작가가 나중에 크게 되잖아요.
예를 들면, 도스토옙스키나 발자크 같은 사람. 빚 갚으려고.
등 따숩고, 배 부르면 글 안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저만해도 욕심없이 끼니 안 굶고 살만하니까 안 쓰잖아요.
적어도 내 안에 늙지 않은 괴물이 있어 그것에 잡혀 먹히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는 박범신 작가의 이유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ㅎㅎ

페크pek0501 2016-10-17 14: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바로는 글쓰기로 성공하려면 재능 이외에 필요한 게 바로 절실함과 두꺼운 얼굴이 아닐까 해요.
글쓰기가 아니면 다른 건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절실함. 오로지 글만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절심함. 글밖에 할 게 없다는 절실함.
그리고 얼굴이 두꺼워야 해요. 창피함을 감내할 수 있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두꺼운 얼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도 뻔뻔할 수 있는 것.

글쓰기가 아니어도 살만 하다면, 창피함을 감내하는 게 싫다면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것. 제 생각이에요.

이런 댓글 쓰면서 저를 돌아보게 되네요...

stella.K 2016-10-17 14:16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근데 전 이게 아직 부족한 것 같더라구요.
글을 쓰고 싶긴한데 절실할 정도는 아닌가 봐요.
이렇게 댓글 놀이가 좋고, 서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게 좋을 걸 보면...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