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책과 램프사이] 屛山書院에서 통일을 이

야기

야코프 하인의 '나의 첫 번째 티셔츠'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한 ‘2006, 서울 젊은 작가들’ (5.7~5.14) 축제에 참가했다. 16명의 외국작가와 20명의 국내작가가 모였다. 아침이면 ‘새로움(freshness)’이라는 주제로 그룹 토론을 하고, 낮에는 청계천을 비롯한 서울 곳곳을 거닐며 세계문학의 오늘과 내일을 전망했다. 서툰 인상이겠지만, 남미는 신나고 서유럽은 우아하며 동유럽은 담백했다.

축제의 백미는 저녁 부석사와 한낮 병산서원이었다. 벗을 깊이 사귀려면 여행을 함께 하라는 옛말처럼, 한국의 정취가 물씬 풍겨나는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니 친밀감이 더했다. 탐색의 시간이 비로소 끝난 것이다. 점심 도시락을 맛있게 먹고 만대루(晩對樓)에서 병풍을 펼쳐놓은 듯한 산수(山水)에 취해 있을 즈음, 우리 조에 속한 독일 작가 야코프 하인(Jakob Hein)이 내 곁에 슬쩍 앉았다.

나는 우선 병산서원을 세운 류성룡(柳成龍)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그는 뜻밖에도 우리 나라 역사에 상당한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 임진왜란을 거쳐 해방 공간을 지나 한국전쟁까지 이야기가 나아갔을 때, 나는 내내 그에게 던지고 싶었던 물음을 꺼냈다. 통일 전과 통일 후가 어떻게 다르냐고. 그는 ‘통일 독일’이 ‘분단 독일’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동독 시절에 대한 그의 회고는 익살과 냉소로 넘쳐났다. 과거를 기억하는 자리에서 흔히 드러나는 촉촉한 눈빛이나 따스한 자세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소설가 배수아의 깔끔한 번역이 돋보이는 ‘나의 첫 번째 티셔츠’(샘터)에서도 그는 “공식적인 국명(國名)에 ‘민주’라는 말을 집어넣는 나라치고 정말로 민주적인 곳은 하나도 없다.”고 꼬집었다. 동독에서 열네 살을 보내기가 특히 힘들었다는 대목이 또한 눈길을 끌었다. “죽도록 엄격한 교사에게 감독받기, 자정에는 집에 있기, 용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심취한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정신과 의사이면서 주말 디제이(DJ)라는 특이한 이력이 여기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의 글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양쪽을 모두 비판적으로 바라볼 때이다. 최인훈의 ‘광장’에서 방황하는 주인공 이명준처럼, 이것은 두 체제를 모두 깊이 체험한 영혼의 냉정한 현실감각이다. 이명준은 조국을 등지고 제3국으로 가다가 자살을 감행하지만, 이 젊은 작가는 통일된 조국을 더욱 깊이 들여다본다. 익살과 냉소는 열망을 두텁게 하는 테크닉이면서 안락과 권태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그치는 회초리인 것이다.

▲ 김탁환
홍대 앞 라이브 클럽에서 열린 송별파티에서 그는 자신의 책 면지(面紙)에 사인 대신 티셔츠를 한 장 그린 후, 이게 바로 ‘나의 첫 번째 티셔츠’라며 맥주를 들이켰다. 시인 성기완이 이끄는 ‘3호선 버터플라이’의 연주가 끝날 때마다 검지를 입술에 끼우고 불어대던 휘파람 소리를 한 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김탁환 소설가·KAIST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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