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하루동안 먹는 음식을 알려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주겠다, 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과거 내 대화의 52%를 차지한 것은 인용의 출처를 정확히 밝히는 것이었는데, 이런 것은 소위 핵심은 되지 못해도 핵심을 빛내는 악세서리로 빛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말할 때 종종 출처가 모호하게 기억나는 경우들이 있어 말하는 방법이 변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 어느 소설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어느 사람을 알고 싶다면 그 사람 집의 어느 부분을 보겠어?’라고 묻는다. 같은 질문을 친절한 ㄷ 씨에게 해보았더랬다. 그는 여러 모로 내게 가장 손쉬운 인터뷰 대상이고 그만큼 재미있는 분석 자료이기도 하다. 어떤 순간은, 그 사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백과사전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떤 항목은 펼쳐보고 싶어 너무나도 궁금하지만, 어떤 대목은 소름끼치도록 보기 싫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장이건 간에, 그 사람이라는 백과사전서는 내게 어느 부분이나 펼쳐 읽고 싶어진다. 마치, 기다리던 책을 알라딘에서 주문해 놓았고, `나의 계정’에 들어가 보니 `배송 완료’라고 쓰인 버튼이 깜박거리고 있는 것을 본 기분.


달리 묻자 그는 한 집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화장실, 이라고 말했더랬다. 화장실이라니, 순간 우리집 화장실이 생각났다. 가족들이 제각각 쓰는 샴푸와 린스, 바디 클렌저 등을 모두가 각자 취향대로 쓰는 이유로 수납장은 터져나갈 것 같고(정말 오만가지 플라스틱 병들이 다 모여있다) 휴지걸이 옆에는 언제나 책이 꽂혀 있는데, 그 책들 역시 서너권은 된다. 모두가 읽는 책들이 제각각 다른 까닭인데, 어찌보면 내가 사는 집의 키워드는 책이 될 것이다.


우리집에는 책이 넘쳐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면 하울이 정말 우울해 할 때에 검은 액체 같은 것이 넘실대면서 하울의 방에서 빠져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나는 우리집에서 검은 액체가 넘실대듯 책들이 걸어나가는 것을 상상해 본다. 부엌에도 책이, 거실에도 책이, 화장실에도 책이 있다. 읽을거리가 없는 공간은 이 집에는 없다는 듯. 하물며 내 방은, 정리를 한다고 애를 썼음에도(물론 아주 가끔) 불구하고 언제나 헛된 수고를 했다는 듯 책들이 넘실댄다. 비단 천여권의 책을 짊어지고 사는 것도 아니고, 내가 소장한 책은 이삼백 여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리는 되지 않고 책들은 넘실댄다.


어릴적 살던 양옥집에는, 작은 다락방이 있었다. 그 다락방에서 엄마는 하루에 한 권씩 책을 꺼내다 주었다. 매일같이 한 권씩 나오는 이야기들, 어느날 그 전집을 다 읽어버려서 엄마는 책을 꺼내달라는 내게 `이제 다 읽고 없어’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게 있어서 그 다락방은, 책을 하루에 딱 한 권씩 찍어내는 공간이었는데 그 공간에서 더 이상 책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날의 상실감에 풀이 죽어있자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두권씩 퇴근길에 책을 사오셨다. 그 속에는 어느날 고무신을 신고 출근하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있었고, 기숙사에 가기 싫어 울던 금발머리 소녀가 있었고, 탑 위에 지어진 학교가 있었다. 나중에 나는 어두운 것을 무서워하는 꼬마 흡혈귀와 비밀노트를 쓰는 옛 러시아 공주의 이름을 가진 소녀와 귀머거리 바이올린 켜는 소녀를 만났다. 초콜렛 공장을 여행하는 아이와 구두속에 사는 난장이들, 빗자루를 빼앗긴 마녀도 만났고 일기를 쓰던 안네와는 조금 다른, 생선 잡이 배 속에 숨어 도망가는 유태인 소녀도 만났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나는 책 속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는데, 더 이상 그 책들을 모두 보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주 아끼던 몇몇 시리즈는 아직도 보관을 하고 있는데 어떤 시리즈의 삽화는 정말 그린 이가 정성을 다한 것이 느껴진다. 80년대 후반, 90년대 초에 나온 그 책들이 독일 가정의 식탁을 그대로 그리고 있기도 하고(이를 테면 삶은 달걀 홀더, 독일 초등학교 교실까지도)주인공이 성장하는 모습에서 이전의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그리기도 했다.


책을 거의 사지 않았던 것은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진학을 하면서였다. 도서관에 빠져버린 나는 신청만 하면 책이 들어오는 시스템에 맞추어 거의 책을 사지 않았고 당시 내가 읽던 책의 80%는 도서관에서 산 책, 당시 내가 구입한 도서의 90%는 도서관에서 읽은 다음 너무 좋아서 읽고나서 구입한 도서였다.


한 번은, 친구 한 명이 내게 소개팅을 주선하겠다며 운을 떼었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나와 코드가 맞을 거란 말을 하다가 말끝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네가 화장품 안사고 옷 안사고 모은 돈으로 책 사는 것처럼, 그 사람은 책 사려고 딱 책 사는 데에 필요한 돈 만큼만 아르바이트 해.’ 그 말에 나는 그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더랬다. 당시에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존경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고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을 읽지 않았거나 노르웨이의 숲 에서 여자아이가 쌌던 도시락 반찬(우메보시였다)을 모르는 이는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은, 책 이야기 말고도 할 이야기가 많아진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책을 읽는 것을 위험하다고 생각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종 어떤 남자들은 내가 읽는 책들을 무섭다, 라고 하거나 이상하다, 라고 말한다. 상종을 말자, 라고 생각한 것은 어설픈 치기일 수도, 자만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세계를 무섭다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이와 소통하지 않을 자유 정도는 내게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존중받고 싶지만 내 세계를 강요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지 않고 그녀의 작품세계가 그닥 궁금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아버지(금융위기 때에 지어진 괴상한 소설이다. 솔직히 말한다면, 그 책을 인쇄하느라 베어진 나무들이 아깝다)같은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라면 혹평밖에 나오지 않지만, 그 책을 감동적으로 읽었다는 이를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 누구나 자신의 취향이 있고 탐닉하는 세계가 있다. 단지, 내가 그, 혹은 그녀들을 존중하는 만큼만 나도 존중받으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이다.


어느정도 쉽게 읽히는 책들도 좋고, 어렵게 읽히는 책들도 좋지만 꼭 필요한 것은 `재미’이다. 내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책은 잘 읽지 못한다. 이를테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작품들을 나는 재미 하나로 읽었다. 이반과 알료샤, 혹은 도박판의 절망, 늙은 노파, 이런 사람들을 읽던 겨울날 내도록 나는 행복했다. 그와 동시에 지금 읽는 닉 혼비의 소설들, 막 읽으려는 폴 오스터의 에세이도 그러하다. 재미 라는 것이 꼭 전자오락 할 때만 나오지는 않는다. 어쩌면 나는, 활자 중독일지도 모르겠다. 그 생각을 한 것은 읽을 거리가 없어 칠리 소스 뒷면의 구성성분을 읽던 순간이었다.


지금 내 방 책장에는 나라별로 정리된 책들이 꽂혀있다. 가장 넘쳐나는 폴더가 영국, 한국이며 최근에는 미국 폴더도 꽉 차기 시작했다. 독일, 이탈리아 쪽이 좀 한산한 것이 마음에 찔려 그 쪽에 장식을 하려고 구스타프 클림트의 매직 큐브(생각보다 정말 별로였지만)를 주문했었다.


지금 나의 계정에는 또 한 권의 책이 배송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두 권을 주문해야 할 것을, 어쩌다 보니 급한 마음에 한 권만 주문한 것. 우리 지역을 담당하시는 택배 아저씨가 이쯤 되면 우리집이 아주 친숙하게 느끼실 것 같기도 하다. 무슨무슨 택배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던 것을 알라딘입니다, 라고 벨을 누르신다니 분명하다. 고마운 마음에, 매일같이 걸음하시게 하여 미안한 마음에 미숫가루라도 하나 타서 드리고 싶기도 하다. 어느날 집에 있던 중에 알라딘입니다, 라는 말을 듣게 되면 꼭 그리 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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