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정말 모를 일이랍니다

김광일 기자의 책 읽어주는 남자

남자가 말합니다. “난 너와 사랑에 빠졌어. 가슴과 머리, 그리고 온몸으로.” 잠깐 멈칫하던 여자가 대꾸합니다. “아, 루카스… 제발 다른 이야기하자. 밥 식겠다.” 아, 밥이 식다니요. 남자는 이제껏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말을 힘들여 쏟아내고 있는데, 도로시라는 여자는 음식이 식을까 걱정이나 하고 있네요. 삶이란, “빌어먹을.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183쪽)요.

최근 독일의 젊은 독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요헨 틸(Jochen Till)의 장편 ‘안녕, 오즈’(Nichts wie weg!)를 권해드립니다. 책 분량은 꽤 되지만 내용은 간단합니다. 루카스라는 독일 대학생이 홍콩을 거쳐 호주로 바캉스를 떠났다가 도로시라는, 꽤 괜찮은, 그러나 연애와 인생에 대해 상처부터 먼저 알아버린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눈 떠가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이 소설도 무쟈게 재미있습니다. 초록색 풋사과 같기도 하고, 초여름 햇빛에 녹아버릴 비누방울 같기도 한 문장들이지만, 요즘 서유럽 젊은이의 솔직한 감성들이 세련된 형태로 드러나 있습니다. 루카스는 도로시와 ‘조루성 첫 경험’을 하고 나서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그것은) 내 동정의 상실, 최대 순수의 상실, 그리고 내가 이 방면에서 뛰어날지도 모른다는 믿음의 상실(이었다). 난 곧바로 정점에 도달하고 말았던 것이다.”(190쪽)

근데 맥 라이언과 케빈 클라인이 나오는 영화 ‘프렌치 키스’에서처럼, 너무도 기분 좋은 경험을 한 주인공이었지만, “빌어먹을”이라고 말하게 되는 사연은 있습니다. 루카스에게 먼저 다가간 것은 도로시였는데, 고개를 돌리는 것도 도로시거든요. “네가 키스도 못해본 채 살아가도록 내버려 둘 순 없잖아. 내가 기꺼이 너의 첫 키스 상대가 되어줄게…. 그러나 너를 좋아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방해가 돼. 당분간은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아.”

⑮세용 소설로 풋내를 맛보셨다면, 다음 코스로 ‘?세용’에 빠져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베로니크 올미(Veronique Olmi)라는 프랑스 희곡작가가 쓴 소설 ‘비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La pluie ne change rien au desir)입니다.

비 내리는 어느 여름날 오후 파리의 도심에서 한 여인과 그 여인의 전 남편이 만납니다. 특별히 용건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대개 프랑스적 소설이나 영화의 분위기가 그렇습니다만, 별 뜻 없이 스치는 스킨십이 모든 변화의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헤어진 지 5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어색한 분위기에 어정대다가 공원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테니스 코트도 회전목마도 비에 젖어 멈춰 있고, 두 사람은 우발적으로 입맞춤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호텔로 이끌어 들어가 정사를 나눕니다. 정열이 아닙니다. 그저 살아간다는 것이 제 옆구리를 드러낼 때 언뜻 보이는 상처들에 관한 뒷담화인 셈입니다.

이 소설은 마치 모든 어휘와 문장에 스타카토 음표가 찍힌 듯 짧게 끊어지고 연결되는 리듬감이 일류입니다. 그 속에 두 사람이 잊고 있었던 상처들이 때늦은 존재증명서를 들이밀면서 새로운 화해를 권합니다.

우리는 헤어지기 위해 만나는 것인지, 아니면 만나기 위해 헤어지는 것인지, 빌어먹을, 정말 모를 일입니다.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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