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안으로 한 걸음…그 곳에서 유년의 나를 만나다

글=신동흔기자 dhshin@chosun.com
여성조선 박근희기자 yaya@chosun.com
사진=조선영상미디어 김영훈기자 adamszone@chosun.com
 

시간은 멈춰 있었다. 용산구 서계동 만리시장 위쪽 배문고 담장과 나란히 나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유년(幼年)의 어느 날 오후, 골목으로 쏟아지던 햇볕에 취해 까무룩해지던 날이 떠올랐다. 어릴 적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만 같던 그 골목길이 여기에 그대로 있었다. 가깝고 따듯하고 익숙하지만 돌아갈 수 없을 줄 알았던 그 곳…. 서울 속에서 떠나는 시간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 찻길에서 배문고 뒤 골목으로 들어서는 초입의 옷 수선 가게. 나무 의자에 얹은 화분 세 개와 받침이 떨어져 나간 간판에선 초라함 보다 낡고 오래된 물건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배문고 뒤편 골목과 만리동 일대는 드라마나 영화를 찍는 이들이 단골로 촬영을 하는 곳이다. 삼선동이나 북아현동의 골목길과 함께, 구불구불 이어진 길은 서울에서도 몇 안 되는 옛날 골목으로 꼽힌다.

몇 차례만 골목을 오가며 처마와 담벼락과 출입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창살 하나, 낡은 나무 대문 하나에서도 빛 바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서울의 다른 골목 지역과 달리 붉은 벽돌로 쌓은 담벼락이 드문 편<사진>이어서 60~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 자주 나온다. 붉은 벽돌집은 80년대 이후 많이 지어졌다고 한다.


오후 2~3시 무렵, 골목에서 막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지나간 뒤 담벼락에는 ‘○○♡△△’ ‘××바보’ 같은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문득 아이들도 골목도 변하지 않았다는 깨달음.

이 일대는 작은 역사 박물관에 비유해도 지나치지 않다. 도시가 개발의 광풍(狂風)을 겪는 동안에도 이 동네는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남아 있다. 골목에서 만난 70대 할머니는 ‘26살에 시집와서 줄곧 이 골목에서만 살았다’고 했다. 이발소나 옷 수선 집, 집 앞에 내어 놓은 화분 하나까지 옛 생각을 나게 하는 곳이다. 골목을 빠져 나와 배문고 정문 맞은 편 위쪽에 있는 성우이용원도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이용원은 영화세트 같지만, 엄연히 영업을 하는 가게.

서울역에서 올 경우, 만리재 길로 올라 와 공덕동로터리 방향으로 진행하다 고개 정상 부근에서 왼쪽으로 좌회전(공덕동 로터리에서 왔다면 우회전)해서 올라가면 된다. 고개 초입에 ‘배문고 방향’을 알리는 팻말이 있다. 서울역에서 롯데마트 정문 쪽으로 나와 0016번 버스를 타면 배문고 앞에서 내릴 수 있다.

골목만 옛날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아니다. 공릉동 서울산업대 캠퍼스는 시대극 전문 촬영장이다. 튀는 건물 하나 없이 키 작은 건물들이 듬성듬성 숨어 있는 곳. 다산관(생산정보공학관)에서 ‘공동경비구역JSA’를 찍었다. 둥그런 모양에 시침·분침· 초침이 제각각 노는 것 같은 투박한 시계탑이 우뚝 솟아 있다. 굳이 이곳이 영화 촬영지였다는 정보가 없어도 TV나 영화 속(특히 과거 회상 장면)에서 몇 번 봤음직한 건물이어서 찾기에 어렵지가 않다. 안으로 들어서면 툭 떨어질 것 같은 샹들리에가 덩그러니 걸려 있고, 중앙 복도를 가로질러 나가면 조그만 뜰도 나온다.

한 눈에 노년기(老年期)에 접어든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낡은 대륙관(토목관)에선 드라마 ‘국희’, ‘제 5공화국’을 찍었다. 녹슨 창살, 뾰족한 지붕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주변에 분홍색 꽃을 피우고 있는 벚나무만 없었다면 흑백 영화로 착각할 정도. 건물 사이사이로 난 길을 거닐어보니 70~80년대를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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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4-27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석재 교수가 쓴 골목길 책입니다. 읽을만 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인 그의 딸은 어려운 외국어는 곧잘 주워섬기면서도 ‘골목길’이란 말은 처음 들었다 한다. 그 아이의 딸은 나중에 또 어떨까. 그때 골목길이란 말이 여전히 남아 있을까?"


 


stella.K 2006-04-27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을 것 같긴한데 책값이 좀 세군요.^^

비로그인 2006-04-27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서점에서 읽으면 되는 분량인데 사진보는 재미로 탐나는 책이죠. (사진때문에 책값이 올랐지만) 요즘 애들이 골목길을 모른다니 충격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