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실록' 시대] 공길 “君君 臣臣, 君不君 臣不臣”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는데,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니…
‘왕의 남자’ e-실록 찾아보니 - 공길, 연산군일기에 등장
장생은 가공인물 네티즌들은 이미 다 알아

영화 ‘왕의 남자’에 나오는 광대 ‘공길’(이준기 분)은 실존 인물? 맞다. ‘공길’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 딱 한 번 등장한다. 연산군 11년(서기 1505년) 12월 29일의 기사다.

“배우 공길(孔吉)이 늙은 선비 장난을 하다가 (…)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는데(君君, 臣臣)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君不君, 臣不臣)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고 말했다. 왕은 그 말이 불경하다 하여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유배 보냈다.” 한자로 70여 글자에 불과한 이 짧은 기사에 풍부한 상상력이 덧붙여져 ‘왕의 남자’가 만들어졌다. 물론 공길이 미소년이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장생’(감우성 분)은 가공 인물.

그런데 많은 네티즌들은 이미 이것을 알고 있다. 인터넷의 수많은 블로그들이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식의 표현으로 이 기사를 인용하고 있는 것. 심지어 12월 29일 기사를 통째로 긁어 실은 블로그도 있다. ‘여인천하’나 ‘장희빈’ 같은 이전의 사극이 방영될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현상이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바로 조선왕조실록 사이트(sillok.history.go.kr)의 등장. 실록 사이트가 등장한 지 7일 만에 개봉한 ‘왕의 남자’야말로 네스토리언들의 텍스트 제1호인 셈이다.


영화에선 연산군(정진영 분)이 중신들을 공격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광대들을 궁중에 부르자 이조판서 성희안(成希顔·윤주상 분)이 “광대패들의 놀음에 놀아나지 말라”고 간하다 파직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록을 검색하면 이 장면은 허구. 성희안이 좌천될 연산군 10년 당시 그의 관직은 이조판서가 아닌 이조참판이었다. 성희안의 좌천 이유는 휘하 군사들의 보인(保人·군사들의 경제적 보조자)이 금표(禁標)를 범한 죄를 물어서였다. 단, 쫓겨난 성희안이 반정(反正)의 주역이 되는 것은 영화에서의 묘사와 같다.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을 빗댄 광대들의 공연을 보다가 선왕(성종)의 두 후궁을 칼로 베고 할머니 인수대비(윤소정 분)를 밀쳐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장면은 어떨까? 연산군 10년 3월 20일 밤에 왕이 선왕의 두 후궁인 엄씨와 정씨를 대궐 뜰에 결박해 놓고 손수 마구 치고 짓밟다가 사람을 시켜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연산군은 정씨의 두 아들을 데리고 인수대비 처소로 가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라며 행패를 부린다. 한 달 정도 지난 4월 27일 인수대비가 병사하지만 연산군의 행패와 직접 연관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그 사이인 3월 21일에 좀 엉뚱하다 싶은 기사가 등장한다. 왕이 “대비께서 연화대(춤의 일종)를 구경하려 하시니 놀이하는 사람을 급히 대궐로 들여보내라”고 한 것. 영화의 ‘경극 장면’은 실록의 이런 내용들을 조금씩 섞은 것으로 보인다.

이준익 감독이 “가장 높은 곳에서 이 판을 보고 있다”고 말했던 내시 김처선(金處善·장항선 분). 영화에서는 반정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스스로 목을 매 죽는 것으로 나온다. 실록에서는 연산군 11년 4월 1일에 왕이 죽음을 내린 것으로 돼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처선이 취해서 간하는 말을 하니 왕이 노하여 친히 칼을 들고 팔다리를 자르고서 활로 쏘아 죽였다’고 한다.”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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