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인간아 > 1월 8일 - 콘스탄트 가드너 (The Constant Gardener, 2005)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무수한 생명의 희생과 살해가 필요합니다. 생계에 의해 선택의 자유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자발적 의사에 따른, 절대적으로 자발적일 수 없는, 목숨과 밥을 담보로 한 무수한 임상실험과 통계도 명확하지 않고 자료로도 남지 않는 개죽음을 통해 완성된 한 알의 알약을 먹고, 당신은 당신의 병을 낫게 하고, 통증을 완화시키고, 구원을 얻고, 또는 플리사보 효과에 지나지 않을 위안을 얻습니다. 당신의 안위와 평안은 거대한 메이저 제약회사의 엄청난 광고효과에 생판 놀아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건, 완전하게 자발적인 앎이 아닌 이상, 누군가의 이익과 자본을 위해 강요된, 음모로 꾸며진, 주입되고 세뇌된 앎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차라리 아프고 말지 굳이 조금 덜 아프기 위해 함부로 약을 먹고 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다못해, 실험실의 모르모트와 새앙쥐들을 생각하면, 내 생명을 이룬 본질이 기괴해지고, 더 고통스러워지기도 하니까요.
영화 <시티 오브 갓>을 보신 분은 기억하실 겁니다. 그 황홀하고 끔찍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신예 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 네, 맞습니다. 이 영화는, 그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원래 이 영화를 감독할 예정이었던 마이크 뉴웰이 <해리포터와 불의 잔>을 연출하게 된 건 다행이고 다행입니다. 페르난도 메이렐레스가 이 영화를 연출하게 된 건, 그의 전작에 담겨 있는 강렬하고 현란하고 비참한 주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는 아프리카에서 불법적으로 벌어지는 메이저 제약회사의 거대하고도 비인간적인 음모를 파해치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제약회사의 불법적인 실상을 폭로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가 비참하게 살해당한 아내를 대신해 아내의 사랑과 휴머니즘, 그리고 모든 진실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애쓰는 남편의 이야기가 웅장하고도 설득력있게 펼쳐집니다. 스토리도 좋았고,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는 구성방식도 매끄러웠습니다. 주제의식과 로맨스의 균형을 잘 잡아낸 점도 매력적입니다. 물론 <시티 오브 갓>에 비하면야 맹숭맹숭한 숭늉 같지만, 두 번째 작품치고는, 그의 재주와 능력이 알맞게 발휘되었다고 축복하기에 충분합니다.
랄프 파인즈라는 배우를, 저는 1996년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통해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버려두고, 그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 서둘러 그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놓인 남자, 끝내 자신을 기다리다가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안아들고 사막의 모래바람을 맞으며 통곡하던 남자의 이미지로, 저는 랄프 파인즈를 기억합니다. 이 영화에서도, 랄프 파인즈의 이미지는 거의 비슷합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거의 10년이 지났는데도 랄프 파인즈의 얼굴과 이미지는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랄프 파인즈의 연기는 정말로 애절하고 구슬픕니다. 사람에 대한 휴머니즘과 아내에 대한 사랑이 중첩되는 모습을 섬세한 표정으로 연기해내는 모습은 정말 멋집니다. 그의 필모그라피를 보니, 왜 이다지도 모진 방황을 했는가 싶게 작품의 꼴이 엉망입니다. 그나마 이 작품을 통해 그가 사막의 방황을 끝내고 돌아온 탕자처럼 진정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게 된 건 정말로 다행입니다.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카메라웤과 주제 의식, 메이저 주식회사에 불법적으로 임상실험을 당하고 부작용으로 죽음을 당해 아무런 기록도 없이 유기되는 상황, 유통기한이 한참 넘은 약을 감지덕지 받아먹고 해맑은 표정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손을 흔드는 어린 아이들의 표정, 음모가 드러나는 걸 막기 위해 청부살인업자들을 고용해 마구 죽여버리는 자본주의의 충실한 개들, 무기력하게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저지하지 못하는 힘없는 진실의 비참, 사랑과 소명 사이에서 방황하고 의심하며 부대끼다 서로 틀어져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영화에 담겨 있습니다. <시티 오브 갓>을 통해 화려하게 데뷔한 페르난도 메이렐레스가 이토록 자신의 기량을 성실하고도 올곧게 펼쳐나가는 모습을 본다는 건 무척이나 흡족한 일입니다.
제약회사는 무기판매회사와 똑같다는 영화 속의 말은, 정말로 들어맞는 말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만큼의 사람을 죽여대는 제약회사의 이면을 알게 된 후, 우리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약을 먹을 수 있게 될까요? '앓느니 죽지.'하는 낮은 신음이, 아직도 제 영혼 속에서 비어져나오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판매하는 것보다, 천진난만한 천사의 얼굴을 하고 구원자의 손길을 내밀어 죽음과 고통을 팔아 배를 채우는 제약회사의 실체는 아직도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더욱 역겹고 무서운 일입니다. 정작 사탄과 악마는 선지자와 구원자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하였으니, 차라리 아프고 말 일입니다.
이 영화는 아마도 영국의 자본과 후원으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등장하는 배우들이 거의 영국국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역으로 등장하는 대니 허스튼과 <러브 액츄얼리>의 한물 간 비실비실한 뮤지션 빌 나이를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이 영화의 호평이 계속 이어져, 아카데미까지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랄프 파인즈가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영광을 다시금 이뤄낼 수 있기를, 이 영화의 메세지가 아프리카의 현실을 조금은 개선시킬 수 있기를,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의 필모그라피가 조금씩 알차고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유통기한이 지난, 부작용으로 선진국에서는 판매금지가 된, 임상실험 단계에 지나지 않는, 약을 통해 삶의 마지막 희망을 이어나가는 아프리카의 고통받는 존재들이 조금이나마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진정한 'Constant Gardener'를 도대체 언제쯤이나 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