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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수업 -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 위한 최고의 질문
박웅현 외 지음, 마이크임팩트 기획 / 알키 / 2015년 6월
평점 :
지금 우리나라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 보다 뜨겁다. 그것을 반영이라도 하듯 지난 1월, 이틀에 걸쳐 한 지식 컨퍼런스가 열렸고, 거기에 무려 4천여 명이 참가 15시간 동안 9명의 연사들이 강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 이 책이다. 읽고 있자니 과연 그 행사가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아마도 그런 행사가 있는 줄 알았다면 나도 한번 기웃거려 봤을 것도 같다. 하지만 이렇게 책으로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하도 뜨거우니 이젠 '인문학'이란 단어를 넣지 않은 책이나 강의는 관심도 끌지 못할 실정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하도 인문학, 인문학 하니 그것에 대한 피로감도 없지 않다. 그럴 경우 우린 꼭 따져 묻는다. 그거 하면 돈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고. 분명 인문학이 그저 이론만을 소개하는 정도라면 그건 죽은 학문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엇이든 각성하고, 적용 가능해야 그 학문은 살아있는 것이 된다. 사실 많은 책들이 인문학을 다루고 있다지만 너무 전문적이고, 깊이만을 추구하다 보면 보고서 형식에서 끝나버릴 수가 있고 따라서 넓게 바라보는 시야가 부족할 수가 있다. 그래서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내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 울 때가 있다. 그럴 때 이런 컨퍼런스가 유용하겠다 싶다. 읽다보면 뭔가 깨어나는 느낌이고 퍼즐이 맞혀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우린 흔히 지식의 깊음만을 추구하지 넓음은 잘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기 나온 9인의 지식인들은 나름 그 분야에선 실력자고, 여러 많은 지식과 경험을 압축시켜 들려주고 있어 유용하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독특한 데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생각하고, 사고해야 얻는 것들을 단시간내에 속성으로 끌어내려고 하는데 탁월하다. 그게 결국 우리나라 교육의 맹점이기도 한데, 질문하지 않고 그러면 그런 줄 아는 것을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피라이터 박웅현의 '왜는 왜 필요하가'는 (실제로 컨퍼런스에서 첫번째 타자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뭔가 문을 여는데 적합한 내용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는 요즘 사회가 스팩을 중요시 하고 있는데 과연 스팩이 중요한지, 왜 쌓으려 하는지를 이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하므로 스펙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한다. 죽으면 하나 쓸모도 없어지는 것ㅣ다. 그렇다고 허무주의를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아모르 파티! 즉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살라고 조언한다.
그는 인생을 100으로 봤을 때 90은 이미 존재하는 기존이요, 9는 이미 이루어진 기성이라고 했다. 그리고 단 1만이 미성, 즉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바로 이 1을 위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은 어떻게 하는가? 이미 그렇게 생겨 먹어 어찌 할 수도 없는 것에 지레 분노하고 좌절하던가, 아직 이루지 못한 그 1에 대해서는 겁내하거나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가장 뜨끔했던 건 '우리는 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의 진중권 편이다. 읽고 있자니 나는 첫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몇 번이나 투표에 참여를 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몇 번 안한 것 같다. 왜 몇 번 밖에 안 했냐고 한다면 답은 뻔하다. 찍을만한 사람이 없고, 찍어 준다고 해도 그 사람이 정말 일을 잘할 사람인지 확인할 길이 없으며, 무엇보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 방송은 하루가 멀다하고 정치인들의 치부와 막말 파문 등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가까운 미래에 저런 사람들에게까지 찍어 줄 표는 없다는 것. 찍을 사람이 없는데 투표를 독려한다는 건 강제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투표를 행사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면 투표를 하지 않을 권리도 민주주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럴듯한 변명이라고 해도 내가 정치에 관심없다는 것과 게으름은 피할 수 없는 나의 진실이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 진중권은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어찌나 논리적인지 반박을 할 수가 없게끔 만든다.
사실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한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정치는 더 나빠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더욱 냉소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른 감시와 관심을 가져 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린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가장 안타깝고 위태롭게 느낀 건 '자본주의가 정의로울 수 있는가'의 장하성의 부분이 아닌가 한다. 사실 나는 정치 못지 않게 모르는 것이 경제다. 그런데 장하성의 말을 들으면 '우리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통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그 지경이 된 거야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직시하니 새삼 이 말을 다시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 그의 말 중 인상적인 건, 이미 유럽은 진보니 보수니 하는 말이 오래 전에 사라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없어지면 큰 일 날 것처럼 철저하고 처절하리만치 대립하여 파벌과 계파 간의 갈등을 끊임없이 조장하는 것이다. 물론 그 배후엔 기득권의 암투와 유언비어가 남발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나는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모르는 것이 결코 약이 될 수 없음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하성은 희망지 말 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대충 얼버무리는 느낌인데 그게 시간에 쫓겨서 그런 것인지 아직까지 이렇다 할 확실한 희망에 도달하지 못해서인지 알 수가 없다. 난 몇 년 전 우연찮게 그의 책을 손에 넣은 일이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나도 도무지 읽을 기회를 갖지 못해 누가 읽겠다고 하기에 내 준 적이 있다. 그게 좀 후회가 된다.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을, 최근 내가 책을 너무 함부로 하는 버릇이 생긴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내가 제일 재밌게 읽었던 것은 '나는 내 삶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의 고미숙의 부분이다. 그는 스스로를 고전평론가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동양철학이나 의학에 해박한 인문학자다. 특히 명리학에 관심이 많은가 본데 나 역시 근래에 들어서 뭔가 인생의 비밀을 알고 싶다는 생각을 부쩍 많이 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생의 비밀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걸 알지 못하고 죽는다면 우리가 개나 돼지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래서 인문학 또한 공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그렇게 읽고 있는데 읽다보니 고미숙은 그런 말을 한다. 연애는 운명의 신비 중 가장 뒤떨어진 것에 속한다. 내가 어떤 리듬을 갖고 내 운명을 창조할 것인가가 중요하지 단순히 누군가를 만나는 게 목표라면 설령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연애는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변태 아니면 권태란 말이 나오는 것이다(105p)라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질 운명이라면 모를까 연애를 못할까봐, 결혼을 못할까봐 지레 조바심내거나 그와는 반대로 일부러 도망치거나 3포 세대라고 미리 포기하거나 하진 말자. 세상이 내가 정한대로만 된다면 그 얼마나 따분하고 재미없는 삶이 될 것인가?
어쨌든 나는 이 책을 읽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안 그래도 시야가 좁고 내가 무탈한 삶을 살면 세상도 그러한 줄 알고 살기 쉬운 세상에서 내가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 같아 흡족했다. 책 말미에 가면 환경학자 안병옥 씨가 가수 홍순관의 노래 '쌀 한 톨의 무게'를 소개해 놓고 있다.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스몄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홍순관의 노래 '쌀 한 톨의 무게' 중
그러면서 안병옥은 그것은 단순히 배고픔을 달래주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고 말한다. 바람, 천둥, 비와 햇살, 외로운 별빛, 농부의 땀 그리고 우주를 나에게로 연결시켜주는 생명의 다리며 그래서 쌀 한 톨을 먹는다는 것은 나와 세계 그리고 우주와 접속하는 일이 된다 (311p)고 했다. 우리가 인문학을 하는 것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세상을 좀 더 의미있게 조망하고, 작은 것에서도 우주를 발견하는 일. 자연과 공동체를 생각하기 위해 우린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