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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의 통일 코드는 '시스템'

 


 중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생존경쟁이 진행됐던 춘추전국시대. 200여개의 경쟁 제후국 중에서 누가 마지막까지 살아남느냐가 관건이었던 이 시대에서 최후 승자는 바로 진(秦)나라였다.

우리에게 폭군으로 약간은 왜곡돼 알려진 진시황제가 다스렸던 진나라는 비록 가장 늦게 출발한 나라였지만 2, 3세대의 짧은 효과적 경영을 통해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됐고, 그로부터 중국은 진(秦:Chin)나라의 이름을 따서 서방세계에는 차이나(China)라고 알려지게 됐다.

 

수많은 경쟁국 중에 마지막 하나 살아남기 게임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진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그리 조건을 가진 나라가 아니었다. 짧은 역사, 험난한 영토 모두가 불리했던 진나라가 어떻게 역사도 더 오래되고 물산도 풍부한 다른 나라들을 제치고 챔피언의 영광을 얻을 수 있었는가는 조직을 경영하는 리더라면 모두 궁금해 하는 문제다. 진나라의 통일. 가장 중요한 코드를 들라 하면 ‘시스템적 경영’이다. 기존 귀족들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기득권을 철폐하고 책임과 역할을 철저히 구분해 공평무사하게 조직을 운영한 시스템적 통치야말로 진나라 성공의 가장 중요한 토대였다.

 

 다른 나라들이 인정(禮)과 기득권의 향수에 못 벗어나고 있을 때 진나라는 가장 먼저 법과 원칙을 가지고 시스템을 만든 나라였다. 이런 진나라의 시스템적 조직 운용론의 기원을 살펴보면 손자병법, 한비자 등과 그 맥이 닿아 있다 할 것이다.


승패 주도권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기원 전 5세기 경의 손자는 시스템과 법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군대를 잘 운용하는 장군은 리더십(道)을 잘 수양하고 시스템(法)을 합리적으로 운영한다.(善用兵者, 修道而保法) 그러므로 승패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故能爲勝敗之政)” 손자의 이 명제 속에서는 리더십(道)과 시스템(法)이 동시에 강조되고 있다.

 

손자가 활동하던 지금의 소주(蘇州)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오(吳)나라는 황하 유역의 전통 있는 나라들과는 달랐다. 명분과 전통을 중요시 여기던 황하 문명국은 전차전과 귀족(士)중심의 부대편성을 통해 전쟁을 했다. 따라서 전차를 기동하고 부대를 지휘하는 귀족의 역할이 일반 병사들보다 상대적으로 강했다. 결국 시스템보다는 영웅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조직이었다. 이런 조직의 문제점은 영웅이 쓰러지면 모든 조직은 와해된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오나라는 보병 중심의 대규모 부대 편성을 중심으로 전쟁했다. 이로써 오나라 군대는 전차전의 한계를 벗어나 장거리 원정이 가능해 졌다. 손자는 이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하기 위해 시스템(法)을 강조했다.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고 대규모 부대를 효과적으로 지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옛날 중소기업이 몇 명의 인원을 통제하는 인정주의 가지고는 더 이상 대기업의 규모를 지탱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인정(人情)과 연(緣)에 의한 인정주의는 당시 구시대의 가치관이었으며 권한과 역할이 제대로 매뉴얼로 나타난 시스템주의가 대세였다.


다른 사람의 임무로 공을 세우지 말라

 

 손자보다 몇 백 년 늦게 활동했던 법가(法家) 지식인 한비(韓非)는 시스템론자였다. 그의 저서 ‘한비자(韓非子)’에서는 조직의 시스템을 파괴는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지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옛날 한(韓)나라에 소후(昭侯)라는 임금이 있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잠이 들게 되었는데 그 옆에서 시중을 들던 전관(典冠 : 임금의 모자를 담당하는 관리)이 술에 취해 옷도 제대로 안 갖추고 잠이 든 임금을 보게 됐다. 이 관리는 자신이 모시는 임금이 추위에 몸이 상할까 걱정이 되어 옷을 임금에게 덮어줬다.

왕이 술에서 깨어 일어나자 자신이 옷을 덮고 자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해 좌우 신하들에게 누가 이 옷을 덮어 주었냐고 물었다. 이에 좌우의 신하들은 전관이 국왕께서 추울까 염려해 덮었다고 보고했다.

이 말을 들은 ‘소후’는 잠시 생각하고는 전관과 전의(典衣 : 임금의 옷을 맡은 관리)를 모두 불러오라고 했다. 전의는 자신의 책무를 저버렸다고 두려움에 떨었고 전관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기쁜 마음으로 소후에게 나아갔다. 그러나 뜻밖에도 소후는 전의와 전관 모두를 벌주라고 명령했다.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임금의 논리는 이러했다.

 

전의는 임금의 옷을 맡아 담당하는 관리로써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당연히 벌을 준 것이었고,  전관은 자신의 임무를 벗어나서 월권했기 때문에 벌을 준 것이었다. 임금 자신이 추위를 싫어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맡은 임무를 저버리고 다른 일에 간섭하는 폐해는 그 추위보다 더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법가의 대표자인 한비는 이 이야기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 하고 있다. “현명한 지도자가 자신의 신하들을 다스릴 때는 신하가 자신의 임무를 벗어나 다른 사람의 임무로 공을 세우게 하지 않는다. 또한 어떤 것이든 신하가 군주에게 한 번 말했으면 그 말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임무를 벗어나서 월관(越官)하면 벌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며, 말한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벌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렇게 모든 신하들이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자신들이 말한 것을 실천에 옮긴다면, 신하들이 붕당(朋黨)을 지어 서로 편싸움을 하지 않을 것이다.” 월관(越官)이 가능한 나라, 시스템이 무시되는 조직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당장은 안 무너져도 오래가지 못한다. 권력기관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라도 과감하게 벨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나라가 산다.


누가 먼저 고대적 사유에서 벗어나는가

 

병법으로 유명한 사마양저란 장군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제(齊)나라 경공(景公) 때의 일이다. 진(晋)나라와 연(燕)나라가 침략해 오자 국왕은 사마양저(司馬穰苴)를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그가 총애하는 신하 장가(莊賈)를 감군(監軍)으로 임명했다. 감군은 왕을 대신해 군대를 감찰하는 직책이었다. 직책은 대장군인 양저 보다 낮지만 국왕을 대신하는 실세 중에 실세였다. 실세라면 자신을 더욱 낮추는 것이 몸을 보존하는 길이건만 장가는 그 이치를 깨닫지 못했다. 양저는 장가와 군문(軍門)에서 출정을 위해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장가는 실세 티를 내며 약속한 시간을 훨씬 지나서 저녁때나 돼서야 나타났다. 대장군 양저는 장가를 꾸짖고 목을 베어버렸다. 실세를 다치게 하면 해(害)가 될 것이라는 부장(副將)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실세에게 칼을 댄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군주의 명령도 때로는 안 들을 수도 있는 것(君命有所不受)’이다. 아무리 사장이라도 조직과 시스템을 뒤로 한 채 마음대로 횡행(橫行)한다면 그 회사가 살아남을 리가 없다. 조직은 살아 있는 유기체며 시스템을 먹고산다. 때로는 조직의 시스템을 위하여 보스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있는 조직이 돼야 한다.

 

 손자가 살던 시대의 고민은 ‘변화의 시대에 누가 먼저 적응할 것인가’였다. 적응이 빠른 만큼 국가 생존능력이 높아진다는 것은 지도자(諸侯)들도 알고 있었다. 문제는 ‘누가 먼저 고대적 사유에서 벗어나는가’였다. 그 중 가장 힘든 것이 인정주의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한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들은 특권층으로 특별히 대접받기를 원했다. 이들의 개혁에 대한 저항은 거셌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을 갖추어도 이들은 구속되기를 거부했고 그들만의 나라를 유지하려고 했다. 결국 그들의 나라는 차례로 멸망했으며 그들의 특권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새로운 시스템으로 정비한 진(秦)나라만이 살아남았다. 진시황제의 강력한 리더십에 시스템을 숭상하는 관료들이 모여들었으며 그들의 합리성은 진나라를 마지막 승자의 나라로 만들었다. 최고(Super)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조직의 발전을 위하여 자신의 팔을 벨 줄 아는 자만이 최고가 될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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