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를 만든다.
 
자신의 삶을 뒤늦게 후회하는 사람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오스카 와일드이다. 시인이자, 극작가, 소설가, 비평가 였던 와일드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1854년에 태어난 그는 영국 최고의 학교에서 교육받으며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그리스어에 출중하고, 트리니티 대학에서 최고의 상을 받기도 했다. 또 옥스퍼드 대학에서 뉴디게이트 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작품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자 그는 많은 돈을 벌었고 런던의 명사가 되었다. 그의 재능은 끝이 없어 보였다. <브리티시 헤리티지>에 쓴 글에서 캘런 캐년은 와일드를 세익스피어 이후 "우리가 가장 거론할 만한 작가"라고 불렀다.
 
그러나 외일드의 인생 말기는 가난하고 비참했다. 그는 방만한 삶을 살다가 감옥에서 인생 말기를 보냈다. 감옥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내 인생을 망친 게 나 자신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위대하건 그렇지 않건 누구나 자기 자신의 손에 의해 망가질 수 있다. 세상은 나에게 끔찍했지만 내가 나 자신에게 한 짓은 훨씬 더 끔찍했다.
 
나는 내 시대의 예술과 문화의 상징적인 존재로 우뚝 섰다.
막 성년이 되었을 때 나는 스스로 그것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도 그 사실을 깨닫도록 해 주었다.
 
한평생 나 같은 위치에 오르고 또 인정받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사람은 죽은 뒤에도, 자신과 자신의 시대가 사라진 뒤에도 역사학자나 비평가에 의해서 되새겨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내 경우는 조금 달랐다. 나는 스스로 나를 인정했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바이런은 상징적인 인물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열정과 열정의 권태와 관계를 맺었다. 나는 좀더 고상하고, 좀더 뎡원한 더 크고 필수적인 문제와 관계를 맺었다.
 
신은 나에게 거의 모든 것을 주셨다. 그러나 나는 무의미하고 육감적인 나태함에 빠져들고 말았다. 나는 빈둥거리고 멋만 내면서 혼자 즐거워했으며, 보잘것없고 추악한 인간들과 함께 어울렸다.
 
나는 내 천재성을 낭비했고 영원할 줄 알았던 젊음을 소진하면서 묘한 쾌락에 탐닉했다. 정상에 서 있던 게 지겨웠던 나는 새로운 감동을 찾아서 일부러 바닥으로 내려갔다. 나는 사고 속에서 역설을 느꼈다면 열정 속에서는 사악함을 느꼈다. 마침내 내 욕망은 병이나 광기, 혹은 그 둘 다로 변해 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허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즐거운 곳에서 쾌락을 느꼈고, 그렇게 시간은 지나갔다. 평범한 하루의 행동 하나하나가 내 인성을 만들거나 파괴함으로써, 나는 비밀의 방에서 한 것과 언젠가 지붕에 올라가 큰 소리로 울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나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 나는 더 이상 내 영혼의 선장이 되지 못했지만 그런 사실을 몰랐다. 나는 쾌락에 몸을 맡겼다. 내 인생은 결국 끔찍한 치욕으로 끝맺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단 하나, 오직 절대적인 수치뿐이다.
 
하루하루 허비한 날들이 결국 어떤 결과를 낳을 지 와일드가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그는 가족도 재산도 존경도 잃고, 삶의 의요도 상실했다. 그는 46세의 나이에 파산한 채 생을 마감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갈 힘이 있다고 믿는다.
 
단, 그러려면 오늘에 집중해야 한다.
 
"오늘 하루는 미래의 이틀을 합친 것보다 더 가치있다.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를 만든다."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은 옳았다.
우리는 오늘을 최고의 하루로 만들 수 있으며, 걸작으로 만들 수 있다.
 
 
존 맥스웰, 오늘을 사는 원칙<청림출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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