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내 이야기인가 보군' 하는 생각에 찾아오신 분들을 위해 먼저 사진을 보여드리지요.

이 정도 생기셨습니까?

 

 

이 그림은 어떻습니까?

 

 

옆모습을 보여드릴까요?

 

 

아, 별로라구요.

네, 사실은 저도 뭐 그렇게 엄청난 미남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면, 미국의 29대 대통령인 워렌 하딩입니다.

1921년에 취임했는데, 1923년 8월에 심장마비로 임기를 채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딩이 잘생겼다고 하는 것은 '꽃미남 스타일이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젊어서는 상워의원처럼 생겼고,

나이 들어서는 대통령처럼 생겼다는 거지요.

그게 문제였습니다.

하딩은 미국에서 잘 생긴 것 하나 가지고 승부한 정치인으로 유명합니다.

젊어서는 기자였고 신문사 편집인을 지내기도 했는데,

정계에 진출한 후 상원의원, 대통령 다 당선됐습니다.

 

하딩은 정치학자들이 선정하는 '최악의 대통령'에서 언제나 수위를 차지하는

미국 역사상 가장 무능한 대통령 중 한 사람입니다.

상원의원 때도 회의나 표결에 거의 참석한 적도 없을 뿐 아니라,

술과 골프, 포커 게임으로 세월을 지샜고,

여자문제도 무진장 복잡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놀러다니느라고 정신없었다고 하구요.

 

그런데도 하딩이 정치의 무대 위에 올라서면,

너무나 능력있는 것처럼 보이고,

목소리 또한 죽이는지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들 깜빡 넘어갔다는 겁니다.

 

바로 이렇게 키크고 구릿빛 피부를 가진 잘생긴 남자가 능력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던 사례를 가리켜,

맬콤 글래드웰은 '워렌 하딩의 실수'라고  부릅니다.

글래드웰은 뉴요커 기자인데 몇년 전 '티핑 포인트(Tipping Pont)'라는 책을 써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몇달 전에 '블링크(Blink)'라는 책을 펴냈는데,

이 책도 출판되자마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뛰어올랐습니다.

 

글래드웰은 '당대 최고의 이야기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재미있는 사례를 들어 풀어가는 솜씨가 대단합니다.

우연히 서점에서 진열대 위에 놓인 '블링크'를 펴들었는데,

그 자리에서 10여페이지를 단숨에 읽고 곧장 계산대로 갔으니까요.

 

The Tipping Point

 

글래드웰은 순간적인 판단의 힘,

딱 한번 보고 알 수 있는 어떤 무의식적인 사고의 힘에 대해서 먼저 소개합니다.

 

예를 들어, 폴 게티 뮤지엄에서 기원전 6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1000만 달러짜리 그리스 조각을 살 것인지 고민을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온갖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해 조사한 결과, 상당히 진짜일 것 같다는

결론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그리스 미술품 전문가가 이 조각을 한번 보고 나서

미술관측에 "돈 지불하지 마라. 이미 줬으면 다시 받아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후 변호사와 과학자들이 몇개월 동안 들러붙어 조사를 한 결과,

이 조각은 가짜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직관의 힘은 놀랍지요?

 

심리학자 존 고트먼은 어느 부부의 대화가 담긴 비디오를 1시간 보고 난 후에

그 부부가 15년 후에 그대로 계속 같이 살고 있을지 아닐지를 95% 이상 정확하게 판단한다고 합니다.

만일 15분짜리 비디오를 본다면, 확률은 90%로 떨어지지만 여전히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교수가 강의하는 장면을 수초 동안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그 교수를 평가하라고 하면,

그 결과는 한 학기 동안 강의를 들은 학생들이 내린 평가와 거의 유사하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때로는 전문가들이, 때로는 보통사람들이 발휘하는

순간적인 판단력의 정확성과 성공적인 직관의 사례가 많이 소개돼 있습니다.

저자는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하딩의 실수'처럼 오류도 발생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편견이 개입해 직관의 정확성을 흐리는 오류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사실은 이 마지막 부분이 저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하는 이 책의 백미입니다.

 

지난 1980년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트럼본 주자를 선발하기 위해 오디션을 했습니다.

응시자는 33명이었는데, 이 중 한명이 이 오케스트라 관련자의 아들이라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막을 치고 그 뒤에서 연주를 하도록 했답니다.

 

16번째 후보자가 커튼 뒤에서 연주를 마쳤을 때,

음악감독은 "우리가 원하는 사람을 찾았다"면서,

오디션을 중단하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응시자들을 모두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트럼본 연주자는 여성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트럼본은 남자만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라는 고정관념이 팽배해 있던 시절이라,

그 자리에서 오디션을 담당한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특히 관악기의 경우 이런 편견이 심했고,

당시 뮌헨 필하모닉에 여성단원은 바이올린과 오보에 주자 한두명 있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의 오케스트라들은 여성들에게 대단히 차별적이었다고 합니다.

힘도 약하고, 폐활량도 적고, 손도 작고, 입술도 작고.... 어쩌고 저쩌고...

뭐 이런 편견을 달아 오로지 백인남자만을 선호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훌륭하신 음악감독과 거장들은

"우리는 한번만 들어도 재능과 능력을 단박에 평가할 수 있다"고 굳게 믿어왔답니다.

외국에 연주여행 나갔다가 호텔에 불러 연주를 시키고 입단 여부를 결정하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자의적인 평가가 횡행했는데,

그 후'커튼 뒤의 오디션'이 자리를 잡으면서 결과는 달라집니다.

 

어떤 오케스트라들은 심사위원들이 후보자의 신상에 대해 알 수 없도록 번호만으로 구분하고,

후보자들이 연주중 기침을 하거나 하이힐 소리를 내서 심사위원들이

성별에 대해 알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 후보에게 다른 번호표를 주어 다시 연주하게 하는 등

편견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철저하게 막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30년을 한 결과,

지금 미국의 오케스트라에서 여성주자의 수는 5배 이상 증가했다고 합니다.

심사위원들은 "우리는 그들의 연주만 들으면 다 알 수 있다"고 했지만,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눈으로 보는 정보가 주는 편견'에 좌우되었다는 것이지요.

 

사실은 저도 직관의 힘을 많이 믿는 쪽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객관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최근에 주간조선에 각 분야에 여성들의 진출이 눈부시게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그간 남성들이 대다수 또는 전부를 이루던 각 분야와 조직이 갖고 있던 높디 높은 진입장벽을

여성들이 뛰어넘는데 성공했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 좋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여성들이 그 조직 내에서 살아남고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한국사회의 많은 분야가 남성에게 유리한 '게임의 룰'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성들은 진입 후에 자리를 잡고 능력을 발휘하는 과정에서 훨씬 더 큰 어려움을 겪지요.

그래서 그러한 문화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아하'하고 깨달은 점이 있습니다.

여성들의 진출이 뚜렷한 분야는 진입여부를 '시험결과'로 평가하는 분야입니다.

이 결과에 대해서 '여자들은 시험을 잘 볼 뿐이다',

'학교에서만 우수할 뿐이다'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자들이 교실이나 시험장에서는 우수할지 몰라도,

현실세계에 부닥치면 그렇지 못하다는 주장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요.

 

시험이란 앞서 예를 들었던 '커튼 뒤의 오디션'과 같은 겁니다.

시험에서 발휘되는 능력 이외의 조건은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더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편견의 개입여지가 없는 '커튼 뒤의 오디션'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더라도,

일단 '정체'가 밝혀지면 다시 한번 편견의 횡포에 노출됩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조직 내에서 여자들이 일하기 어려운 한 요인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례가 '블링크'에 소개돼 있습니다.

커튼 뒤에서 연주할 때는 '바로 우리가 찾던 사람'이라고 환호했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평가는

점차 달라져서 다시 호흡이 짧다느니 하는 등의 이유를 대면서 이 여성을 제2주자로 강등시킵니다.

이 여성은 결국 이 문제를 법정으로 가지고 갔고 승리합니다.

 

마치 워렌 하딩의 외모가 유능할 것처럼 보인다는 착각 때문에 

유권자들이 무능한 정치인에게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본의아니게 제공했던 것처럼,

유능한 연주가가 편견 때문에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지요.

 

객관적이 된다는 것은 정말 어렵지요?

무의식적으로 편견에 사로잡힌 평가를 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커튼 뒤의 오디션'같은 장치를 더 많이 만들어내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단 여성들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복잡한 조건 중 하나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편견에 사로잡힌 직관적인 평가'에 희생되어

피해자가 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출처:14번가의 기적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클리오 2005-02-21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험과 여성에 관한 이야기.. 저도 동의합니다. 남자들도 일자리가 없다고 하지만, 다양한 회사 취직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데 반해, 특히 지방으로 오면 도서관에서 여학생들은 오직 공무원 시험과 교사 임용고시 준비밖에 안합니다!!

stella.K 2005-02-21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그렇군요.

털짱 2005-02-21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진 글과 힘있는 논리력에 추천한방 날립니다.^^

stella.K 2005-02-22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털짱님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