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언제나 문맹이었다

김재혁 옮김/ 이레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열다섯이던 해에 나는 황달에 걸렸다’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그녀의 무덤 앞에 선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로 끝난다.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뛰고 호흡이 빨라지는 독서는 오랜만이다. 슬픈 이야기도 행복한 이야기도 아니다. 사랑과 역사에 대한 진실한 이야기일 뿐이다.

모두 3부로 나뉜 이 소설의 1부에서 열다섯 살 미하엘은 서른여섯 살 한나와 사랑을 한다. 10월 어느 월요일 학교에서 돌아오던 미하엘은 반호프 거리를 지나다 허약해진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구토를 한다. 황달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마침 곁을 지나던 한나가 자기 집에 데려가 그를 씻어주고 위로해준다. 미하엘은 어머니가 권한 대로 다음 해 2월 꽃다발을 사들고 고맙다는 말을 하러 한나의 집을 찾는다.

배경은 1950년대 독일의 어느 작은 도시다. 나치 전범을 재판하는 절차가 곳곳에서 뜨겁게 진행되고 있던 사회 분위기이지만 미하엘과 한나 두 사람은 깊은 사랑에 빠져든다. 사랑은 치정이었고, 사랑은 문맹이었다. 불행인지 행운인지는 모르지만 그때도 사랑은 당대성이 없었고, 사랑은 언제나 앞모습이 안 보였다.

‘다음 날 그녀와 만났을 때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고 하자 그녀는 몸을 뺐다. “그 전에 먼저 내게 책을 읽어줘야 해.” 그녀는 진지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샤워실로, 침대로 이끌기 전 반시간 가량 그녀에게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어주어야 했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이것이 우리 만남의 의식(儀式)이 되었다.’

소설은 그때 시점을 따라가기도 하고, 장년이 된 미하엘의 회상 형식을 띠기도 한다. 독신인 한나의 직업은 전차 차장이었고, 미하엘은 철학 교수의 아들로 2남 2녀 중 셋째였다. 둘은 한나의 교대 근무가 끝나는 시간과 미하엘의 하교 시간을 맞춰가며 주로 한나의 집에서 관능에 탐닉한다. 그것이 인생을 걸 만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미하엘에게 태양은 빛났다. 적어도 한나가 아무 말없이 잠적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 역사적 상황을 관통하면서 인간 조건을 형성했던 시대에 우리들의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슐링크는 진지하게 묻고있다. 완전히 솔직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해….
미하엘은 점차 한나를 잊어가고 자연스레 법대 대학생이 됐는데, 7년이 흐른 어느날 전범 재판이 벌어지던 법정으로 현장 학습을 나갔던 미하엘은 피고인석의 한나를 발견한다. 그녀는 2차대전 동안 유대인 수용소의 감시원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소설의 2부가 시작된다. 여성 수감자들이 불타는 교회 건물에 갇힌 채 떼죽음당하는 것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한나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역사에 의해 강제된 상황 속에서 살인과 죽음에 마비돼 있었던 개인의 행위는 어떻게 범죄를 구성했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과 번뇌로 이어진다. 당시 수용소의 감시원이었던 여인이 여럿 체포됐지만 한나는 오로지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쓴다.

3부는 미하엘이 교도소에 갇힌 한나에게 책을 낭독한 녹음테이프를 부쳐주는 대목으로 이어진다. 그 사이 미하엘은 결혼했다가 딸 하나를 둔 채 5년 만에 이혼한다. 한나에겐 어느덧 18년이 흘렀다. 사면위원회가 그녀의 석방을 결정하고, 미하엘은 한나를 면회한다.

독자들은 이제 미하엘에게 한나가 영원하고도 소중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미하엘과 한나의 이야기를 과거사 문제로 연결해야만 한다는 부담을 떨쳐버리고 그저 인간과 사랑으로 읽어도 좋은 날을 꿈꿀 수 있을 것인가?

밤새워 읽어버린 소설책을 덮자 한나가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이제 뭘 원해요? 하룻밤 동안에 당신의 인생 전체를?”

아니, 하룻밤 동안에 역사 전체를?

저자(Schlink·60)는 법대교수이자 판사이면서 작가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원제 ‘Der Vorleser’)은 1995년에 발표됐고, 35개어로 번역됐다. 한국어판은 1999년에 세계사에서 나왔다가 이번에 재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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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12-11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기사를 읽었네요. 저도 봤어요^^

icaru 2004-12-12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이 이레에서 새롭게 나왔네요~

오옴... 저는 그닥 집중력이 없는 편인데... 책 읽어주는 남자는 앉은 자리에서 속사포처럼 읽었다는....

꽤 재밌었어요...

stella.K 2004-12-12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그렇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