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활동사진을 연속적으로 기록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프랑스 박물학자 마레(E.J. Marey)는 1888년에 권총형 사진기를 개량하여 감광판을 회전시켜 새의 잇따른 자세를 1초에 12회 촬영하였다. "연속기록사진장치"로 불린 마레의 카메라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영화촬영기의 모든 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은 1888년에 자신의 발명품인 축음기와 활동사진을 결합하여 1초에 48장의 사진을 찍는 활동사진 카메라를 만들었다.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라 불린 그의 영사기는 카메라로 찍은 음화를 양화로 만들어 구멍을 통해 직접 육안으로 들여다 볼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영화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에디슨의 스튜디오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의 스튜디오에서 영화를 본 사람들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급증하자 미국 곳곳에서는 5센트만 내면 영화를 볼 수 있는 극장들이 번창하였다. 5센트 극장은 대중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스타를 키우는 일이나 화면을 크게 하는 일에 과감히 투자하였다. 이에 반해 에디슨은 흥미보다는 교육과 관련된 영화를 제작하였고, 스타나 화면과 같은 외형적인 것보다는 영사기의 성능을 개선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에디슨의 사업전략은 점점 소비자의 기호와 멀어지게 되어 에디슨은 "영화를 발명했지만 영화사업에서는 실패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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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대와 1850년대에는 전지를 대체할 수 있는 전기 발생장치로서 발전기를 제작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이러한 발전기들은 절연된 철사를 코일로 감아 그것이 철제 영구자석의 자기장 안에서 기계력에 의해 회전되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성능이 좋은 영구자석이라도 극히 약한 자기장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유형의 발전기는 효율이 별로 뛰어나지 않았다.
독일의 기술자이자 기업가인 지멘스(Ernest W. Siemens)가 이 한계를 돌파하였다. 그는 1856년 기존의 발전자를 개량하여 T형 이중 발전자를 제작한 후 1866년에 이 발전자를 활용하여 자기 여기 방식의 발전기를 개발하였다. 그의 발전기는 강철의 영구자석 대신에 발전기 자체에서 나오는 전류를 사용한 강력한 전자석을 사용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경우에는 전자석의 철심에 전류가 흐르지 않아도 적은 양의 자기가 남아 있기 때문에 코일을 돌려주면 다시 전류가 발생하고 그것을 동력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부수적인 이점도 있다.
지멘스는 발전기의 응용 분야로서 전차에 주목하였다. 그는 1879년 베를린 박람회에서 전차를 선보였는데, 그것은 "지멘스의 회전목마"라는 애칭을 얻었다. 1881년에는 세계 최초의 전기철도가 대중교통기관으로서 베를린의 거리를 달리기 시작하였고 1890년이 되자 유럽과 미국의 많은 대도시에 전차선이 구축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또한, 1882년에 에디슨에 의해 전력의 상업화가 가능해지면서 지멘스의 발전기는 공장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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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너마이트는 스웨덴 화학자 노벨(Alfred Bernhard Nobel, 1833∼1896)이 발명한 니트로글리세린을 함유한 폭약의 총칭이다.
1846년 이탈리아의 소브레로가 최초로 합성한 니트로글리세린의 폭발위력은 당시까지 사용되던 흑색화약에 비해서 매우 강했지만, 충격이나 마찰에 의해 쉽게 폭발했을 뿐 아니라 액체상태였기 때문에 취급하기가 어려웠다.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을 정확하게 폭발시키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여 뇌관을 발명했으며, 1866년 니트로글리세린을 고체상태로 만들기 위해 규조토에 흡수시켜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하였다. 니트로글리세린의 보급으로 폭발사고가 잇따라 일어나 노벨도 동생을 잃는 등 많은 희생자가 발생해 국제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으나 그는 실험을 계속하여 보다 폭발력이 크고 효율적인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냈다.
그는 약 355종류의 특허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경영한 15개의 화약공장을 기반으로 모은 재산을 스웨덴 과학아카데미에 유산으로 기증하였고, 그의 뜻에 따라 노벨상이 제정되었다.
노벨은 원래 평화주의자로서, 자신의 발명품이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기여하길 바랬다. 그러나 다이너마이트는 산업자본을 이룩한 구미각국이 제국주의의 길로 접어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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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대 후기에 탄생한 전신 기술은 해저에 전선을 부설하여 대륙 간에 통신망을 개발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그리고 1848년에는 독일의 에른스트 베르너 폰 지멘스가 해저 전선에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절연체를 개발했다. 2년 후 영국의 도버와 프랑스의 칼레를 잇는 첫 번째 해저 전신 부설이 시도되었으나 실패하였고, 1851년에 두 번째 전선이 시도되어 마침내 성공하였다. 이 해저전선이 설치됨으로써, 런던과 파리의 주식거래소는 주가에 대한 정보를 당일로 교환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20년간 계속하여 전신에 이용되었다.
대서양 횡단 해저 전선은 1858년에 아일랜드와 미국 뉴펀들랜드 간에 연결되었으나 케이블의 절연 실패로 사용되지 못하였다. 최초의 성공적인 상설 대서양 횡단 해저전선은 1866년에 놓여졌으며, 1865년에 일부가 세워졌던 또 다른 해저 전선 역시 1866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미국의 앤드류 존슨 대통령이 이 전선을 통해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이 사업을 주도한 사람은 미국의 자본가 C. W. 필드와 영국의 과학자 켈빈경이었다.
이 전선의 성공에 이어 세계 각지의 바다에 잇달아 전신해저전선이 부설되었다. 세계의 주요 전신 해저 전선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거의 부설되었으며, 1913년에 총 길이 52만km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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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많은 새로운 원소들이 추출되고 성질이 밝혀졌지만 원소들을 분류하려는 시도는 산발적으로만 이어졌다. 더욱이 1860년대에 70여 가지에 이르는 새로운 원소가 발견되고 그 원소들의 속성을 잘 이해하게 되면서 원소들을 분류하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것이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이다.
어려서부터 물리학과 수학에 탁월하며 비상한 지능을 자랑하던 러시아 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Demitri Mendeleev, 1834-1907)는 낱장의 카드를 통해 다양한 원소들의 기저에 버티고 있는 일련의 통일성을 찾아내었다. 그는 원소들의 원자량과 대표적 성질을 낱장의 카드에 적고 카드들을 죽 늘어놓았는데, 원자량에 따라 정렬해 보니 "원자량의 크기가 원소의 성질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아냄으로써 1869년 주기율표를 제출하였다.
주기율표를 통해 원소들의 체계를 잡은 멘델레에프는 그때까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들의 존재까지 예견하였는데, 실제 이 예상은 1875년 갈륨, 1879년 스칸듐, 1885년 게르마늄이 발견됨으로써 입증되었다.
멘델레예프 외에도 거의 같은 시기에 마이어(Lothar Meyer), 드 상쿠르투아(Alexandre-Emile Beguyer de Chancourtois) 등도 비슷한 주기율표를 발표했지만, 명쾌한 설명과 발견 원소의 성질을 과감히 예측한 점 등 때문에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가 표준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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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용하는 모든 전자기 기술은 물론 전자기학의 모든 법칙의 기본이 맥스웰 방정식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턴 물리학과는 달리 '장(field)'이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영국의 물리학자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이 정식화한 4개의 방정식은 이후 전자기학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맥스웰 방정식은 전기와 자기를 측정 가능한 단일한 힘으로 합쳤다. 이 방정식에 의해 전자기파의 존재가 예언되었고, 빛도 전자기파의 일종임이 밝혀졌다. 모든 전자기 법칙은 맥스웰 방정식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전자기학뿐만 아니라 색깔론, 천체 역학, 기체 분자 운동론 등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맥스웰은 패러데이의 고전적 장 개념을 발전시켜 장이론과 자신의 방정식을 정식화하였다. 그는 패러데이의 역선 개념에서 벗어나 전류가 흐르면 도선 주위의 공간의 성질이 바뀐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당시 공간을 채우고 있다고 믿어진 에테르를 이용해서 전자기 현상을 설명했다.
에테르의 개념은 이후 잘못된 것으로 판명됐지만 맥스웰 방정식은 자연계의 가장 중요한 방정식의 대열에서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맥스웰 방정식이 제시하는 물리량의 수학적 형태가 물체의 운동에 변함없이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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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타자기의 원조에 해당하는 레밍턴 타자기는 1874년에 등장하였다. 1876년 필라델피아 박람회에 출품된 레밍턴 타자기는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었지만 그것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타자기의 확산 속도는 매우 느려 1880년까지 팔린 타자기의 수는 단 5천 대에 불과하였다. 당시로만 해도 활자로 된 글은 오직 선전 광고뿐이었고 타자로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은 인격적 수준이 낮은 사람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었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직장의 구체적인 일까지 산업화의 영향이 미치기 시작하면서 타자기의 판매율은 급속도로 증가하여 1888년에는 5만대의 타자기가 팔렸다.
타자기에 얽힌 다른 이야기는 QWERTY로 알려져 있는 자판의 배열순서이다. 레밍턴 터자기를 제작했던 숄즈(Christopher L. Sholes)는 처음에 자판을 알파벳 순으로 배열했다. 그는 글쇠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알파벳의 순서를 바꾸어 실험을 계속하다가 현재의 자판 배열을 확정하였다. 그 후 QWERTY보다 더욱 간편하고 효율적인 자판 배열이 여러 번 제안되었지만 기존의 자판 배열에 익숙한 소비자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기존 관행의 견고함이나 교체 비용의 막대함이 기술적 우수성을 눌렀던 것이다. 최근에는 첨단 기술 제품에서 자주 나타나는 지배 디자인의 위력을 뜻하는 용어로 "QWERTY 경제학"이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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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바꾸어 놓은 통신 수단 중 가장 획기적인 것은 전화였다. 전화의 기본 원리는 소리를 여러 가지 주파수의 전기 신호로 바꾸었다가 다시 원래의 소리처럼 들리도록 재생하는 것이다.
1831년 영국인 마이클 패러데이가 금속의 진동을 전기 신호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냄으로써 전화의 이론적 기초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1861년까지는 아무도 이 원리를 이용하여 소리를 전송하진 못했다. 독일의 요한 필리프 라이스는 1876년 소리를 전기 신호로 바꾸었다가 다시 소리로 전환하는 간단한 기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계는 조잡해서 모든 영역의 주파수를 다 전송하지 못했고, 따라서 더 발전하지 못했다.
최초의 실용적인 전화는 미국의 엘리샤 그레이와 스코틀랜드 태생인 알렉산더 그레함 벨이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믿을 수 없게도 두 사람은 같은 날 특허출원을 냈는데, 벨이 그레이보다 두 시간 빨라서 벨에게 특허가 주어졌다.
최초의 전화 교환국은 1877년 코네티컷의 하트포드에 설치되었다. 최초로 교환국이 도시간에 연결된 것은 1883년 뉴욕, 보스턴 간이었다. 미국 외에서 최초로 교환국이 설치된 곳은 1879년 런던이었는데, 교환국에는 큰 스위치판과 그 앞에서 일하는 교환수가 있었다. 교환수는 결려오는 전화를 받고 수동으로 전화 받을 곳에 연결하였다.
동전을 넣는 공중 전화기는 1889년 하트포드의 월리엄 그레이의 특허이다. 그리고 최초의 다이얼식 전화는 1923년 프랑스의 안토니 바르네가 개발하였다. 이동 전화는 벨 전화 회사에서 개발되어 1924년 뉴욕 시경이 사용하였다. 1946년에는 최초의 상업적인 이동전화가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후 40년이 지나도록 일반화되지는 못했다.
1978년 벨 연구소는 미국 전화 전신 회사(AT & T)를 설립하고 지역을 육각형의 셀로 나누는 방식의 이동 전화 시스템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통화자가 탄 자동차가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면 자동 전환 시스템이 다른 셀로 방해 없이 부드럽게 연결해 주는 것이다. 이후 셀룰러 방식의 전화 시스템은 1981년 미국 전역에서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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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의 생활에 편리하게 쓰이는 전등은 1879년 토마스 에디슨과 영국의 조셉 윌슨 스완 경에 의해 동시에 발명되었다. 그러나 전등의 역사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1811년 험프리 데이비 경이 두 전극 사이의 방전에 의한 빛을 발견하면서부터 전등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파리의 콩코드 광장의 가로등으로 실험적으로 설치된 것은 아크등이었고, 미국과 유럽에서도 다양한 실험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아크등은 너무 빨리 타 버렸기 때문에 비실용적이었다. 이 문제는 적당한 전도체, 또는 필라멘트를 용기나 유리구 안에 필라멘트가 타지 않도록 산소 없이 집어넣는 방법을 고안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스완은 최초로 전등을 개발했으나, 그 역시 전등 안을 진공으로 유지하는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에디슨이었다. 1879년 10월 21일 그는 40시간 동안 빛난 탄소 필라멘트 전등의 연구 결과를 직접 실험해 보였다. 1880년 말에는 1500시간을 견디는 16와트 전등을 만들었고, 이것을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토마스 에디슨은 전기 기구의 역사상 가장 많은 발명을 한 발명가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1910년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의 윌리엄 데이비드 쿨리지는 전등의 수명을 크게 연장시킨 텅스텐 필라멘트를 발명하였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전등은 아르곤이 아트 전압이 낮은 관계로 보통 아르곤 85%와 질소 15%의 혼합 가스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열손실을 감소시켜 효율을 좋게 하기 위해 필라멘트를 코일 모양으로 치밀하게 감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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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atom)의 어원은 "쪼개지지 않는다"는 뜻의 그리스어다. 과학자들은 오랫동안 원자는 단단한 당구공 같은 것이며,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의 최소 단위라고 믿었다. 1897년 영국의 조셉 톰슨은 원자 내부에 질량이 수소 원자의 1/1000 정도밖에 되지 않고 음의 전기를 띤 아주 작은 입자, 즉 전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전자와 뒤이은 원자핵의 발견은 "원자핵 주변에서 전자가 어떻게 분포하는가?" 하는 원자 구조의 문제를 낳았다. 특히 닐스 보어의 원자 구조는 최외각 전자들의 분포를 통해 화학 결합의 원리, 주기율표에서 여러 물질들이 비슷한 특성을 보이는 이유 등을 이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또한 전자의 발견은 양성자, 중성자, 중성미자, 양전자 등 수많은 소립자 발견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이 소립자들을 통해 우리는 물질과 자연에 존재하는 여러 힘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주변에서도 전자를 이용한 기술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전자는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가지는데, 특히 전자의 파동성에 기반한 전자현미경을 쓰면 물질 분자를 관찰할 수 있다. 또 TV의 음극관은 금속을 가열할 때 광전자가 방출되는 효과를 이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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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활동사진을 연속적으로 기록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프랑스 박물학자 마레(E.J. Marey)는 1888년에 권총형 사진기를 개량하여 감광판을 회전시켜 새의 잇따른 자세를 1초에 12회 촬영하였다. "연속기록사진장치"로 불린 마레의 카메라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영화촬영기의 모든 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은 1888년에 자신의 발명품인 축음기와 활동사진을 결합하여 1초에 48장의 사진을 찍는 활동사진 카메라를 만들었다.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라 불린 그의 영사기는 카메라로 찍은 음화를 양화로 만들어 구멍을 통해 직접 육안으로 들여다 볼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영화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에디슨의 스튜디오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의 스튜디오에서 영화를 본 사람들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급증하자 미국 곳곳에서는 5센트만 내면 영화를 볼 수 있는 극장들이 번창하였다. 5센트 극장은 대중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스타를 키우는 일이나 화면을 크게 하는 일에 과감히 투자하였다. 이에 반해 에디슨은 흥미보다는 교육과 관련된 영화를 제작하였고, 스타나 화면과 같은 외형적인 것보다는 영사기의 성능을 개선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에디슨의 사업전략은 점점 소비자의 기호와 멀어지게 되어 에디슨은 "영화를 발명했지만 영화사업에서는 실패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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