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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 류시화 제3시집
류시화 지음 / 문학의숲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시는 언제나 나에겐 관심 밖이었다.
어쩌면 그리도 속 깊은 것인지? 어쩌면 그리도 낮선 것인지?
내가 나를 알 수가 없는데 남의 속 깊은 뜻을 어찌 알까 싶어 일부러 외면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문외한이 되었다. 그래도 시인 류시화를 모른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워낙에 시로, 번역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라 언젠가 한번은 그의 작품을 마주하고 싶었다.
비록 우리는 시인이 될 수 없을지라도
시인의 시는 뭐랄까, 명상을 하는 시인이라서 그럴까? 상당히 깊은 언어의 세계를 구가한다. 또 그래서 그럴까? 그는 시인의 시어를 사랑한다. 정말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어떻게 만들어질까 궁금하다. 그에 대한 실례로 시인은 몇 가지 단어를 그만의 언어로 재해석 한다.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으리라'고 하면서,
봄은 떠난 자들의 환생으로 자리바꿈을 하고
제비꽃은 자주색이 의미하는 모든 것으로
하루는 영원의 동의어로
인간은 가슴에 불을 지닌 존재로
얼굴은 그 불을 감추는 가면으로
(32p)
그렇다. 세상에 벼라별 사전이 다 있으면서 시인의 사전이 없다니? 만약 시인의 사전이 있었더라면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워질까? 다른 건 몰라도 시인은 단언하건데, 세상의 많은 단어들이 바뀌었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눈동자는 별을 잡는 그물로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로(33p) 말이다.
그리고 또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사랑은? 인생은? 죽음은? 미움은? 후회는? 절망은? 어제는? 만남은? 이별은......?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나 나름의 언어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요는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도 같다. 그것이 꼭 시인이 되는 것이 아니어도 좋으리라.
언어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에 어느 정도 긍정하고 싶다. 요즘의 싸구려 언어는 타인을 공격하고, 스스로를 자해하고 있다. 메스가 사람을 살리는 도구도 될 수 있고 해하는 도구도 될 수 있는 것처럼 언어 또한 그렇지 않는가? 오늘 하루동안의 생각들, 무심코 썼던 말들을 종이에 써 보라. 그것이 그 사람을 말해 줄 것이다.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를 할 때 나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다 좋은 마음과 정제된 언어로 기도를 한다. 인간이 쓰는 언어는 그래야 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비록 시인이 될 수 없을지라도 소망의 언어탑을 쌓아야 할 것이다.
가끔 K2본부에서 하는 <김승우의 승승장구>라는 프로를 보면 그날의 출연 게스트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단어를 꼽으라고 한다. 그래서 그 단어의 의미와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를 재해석하게 한다. 사람이 쓰는 언어란 그런 것이구나 싶다.
상처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
시인은 말한다.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이라고.
시인은 유독 시집에서 상처를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긍정적이고, 자기치유적이다.
요즘은 하도 상처 받았다는 사람이 많고, 그것을 다루는 책도 많이 나왔고, 치유법도 많아졌다.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겠지만 그런 현상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뭐 그리 상처가 많아서 성처, 상처 하는 것일까? 세상은 온갖 이론을 앞세워 상처를 규명하려고만 한다. 상처가 있으면 그것을 치유하는 방법도 자기 안에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것들을 무력화시키고 자기 스스로는 고칠 수 없다고 그러고, 다른 것에서 상처를 치유 받으라고 하고, 잊으라고 한다.
왜 상처는 똑바로 응시하면 안 되는 걸까? 내 안에 상처 이외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나는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이라는 말에 동감한다. 나도 지난 날 적지 않은 상처를 받고 살아왔다. 아니 상처 받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물론 그것은 되네이기도 싫은 것들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때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지금은 이해가 되면서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게되고 나는 더 넓고 깊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시인이 상처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옹이'라는 시에서가 아닌가 싶다.
흉터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이것도 꽃이었으니
비록 빨리 피었다 졌을지라도
상처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눈부시게 꽃을 밀어 올렸으니
비록 눈물로 졌을지라도
죽지 않을 것이면 살지도 않았다
떠나지 않을 것이면 붙잡지도 않았다
침묵할 것이 아니라면 말하지도 않았다
부서지지 않을 것이면, 미워하지 않을 것이면
사랑하지도 않았다
옹이라고 부르지 말라
가장 단단한 부분이라고
한때는 이것도 여리디여렸으며
다만 열정이 지나쳐 단 한 번 상처로
다시는 피어나지 못했으니 (12P)
상처에 대해 이만큼 통찰적이고 잘 표현한 시도 드물것이다. 상처는 없애고, 잊어버려야 할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쩌면 상처는 보듬고, 이해하고, 토닥여줘야 잘 아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처는 미워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긍휼히 여겨야 하는 대상인지도 모른다. 그 상처도 상처가 되기까지 얼마나 싫었을까를 생각하면 말이다. 상처는 어찌보면 미리 열어 본 판도라의 상자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시집의 제목은 '이런 시를 쓴 걸 보니 누구를 그 무렵 사랑했었나 보다'란 시에서 따온 것이다.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만 나는 너에게 꽃을 준다, 삶이여 나의 상처는 돌이지만 너의 상처는 꽃이기를, 사랑이여 삶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잘 가라, 곁방살이 애인아(110P)
사랑도 대상이 있어야 하듯 상처도 대상이 있어야 한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다분히 자조적이기도 하고 나로 인해 상처 받았던, 다시 말하면 상처를 줘야만 그 누구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도 같다. 그것도 너무 미안해 직접 구하지 못하고 한낱 자의적으로 조그맣게 구하는 용서. 나는 그에게 사랑이 되길 바랬는데 한낱 돌 같은 상처 뿐이었다니. 그돌 나에게 주고 너의 기억속에 나는 꽃같이 남아 있기를 사람들은 하나 같이 바라는 걸까? 사랑도, 상처도 이해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것을 삶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이었던 적이 있냐고 자조적으로 되묻고 있다. 우리의 것이 었다면 상처도 주지 않고 사랑을 이루고 살았겠지.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그렇다. 따지고 보면 내 삶이 아니었던 그 알량한 삶도 나의 삶인 것이다. 그것은 얼굴을 마모 시키고 주름으로 남겠지. '잘 가라, 곁방살이 애인아' 끝내 다가서지 못한 사랑을 곁방살이 애인이라면서 보내기 까지 했다. 상처만 줬던 곁방살이 애인. 사랑은 그리도 두려운 것이었을까? 피해버리고 말게. 그렇다면 앞으로 누구를 만나든 사랑 아니면 상처를 주겠구나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난 이 시가 참 마음에 든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였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였다
(중략)
중심에 있는 것들을 위해서는 많은 눈물 흘리면서도
비켜선 것들을 위해서는 눈물 흘리지 않았다
(중략)
곁눈질이라도 바라보아야 할 것은
비켜선 무늬들의 아름다움이었는데
일등성 별들 저 멀리 눈물겹게 반짝이고 있는 삼등성 별들이
있었는데
절벽 끝 홀로 핀 섬쑥부쟁이처럼
조금은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야 저녁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아, 나는 알지 못했다.
나의 증명을 위해
수많은 비켜선 존재들이 필요했다는 것을
언젠가 그들과 자리바꿈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한쪽으로 비켜서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했다는 것을
비켜선 세월만큼이나
많은 것들이 내 생을 비켜 갔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였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잠깐 빛났다
모습을 감추는 것들에 대한 예의였다 (118~119P)
문학의 증명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비켜선 것들에 대해 사람들이 예의를 갖추도록 하는 것.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그것만이 그들의 세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 그래서 문학은 늘 약자의 편이고, 잊혀지고 감추어진 것의 편인 것이다. 그것이 문학의 사명이며, 인간적이 아닌 것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문학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매력적이면서도 위대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또한 그것은 나에게 '시'가 아닐까 싶다. 나는 앞서 시에 대해 문외한이라고 말했는데 그동안 내가 얼마나 시에 대해 예의가 없었는지 이 시를 대하는 순간 조금은 뜨끔했다. 시는 나에게 '절벽 끝 홀로 핀 섬쑥부쟁이'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은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야 저녁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아,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는 시인의 말처럼 언젠가 자리바꿈할 날'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시는 그저 항상 거기에 그렇게 있을 뿐이다. 그것의 진가를 알아주고 못 알아주는 것은 시를 대하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둘 뿐이다. 시를 좀 더 가까이 해야겠다.
그밖에...
나는 시인의 이런 말도 좋아한다.
'적신호에도 멈추지 않는 사랑을 좋아한다
빛을 들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어둠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시인을 좋아한다'(122p)
나도 이랬으면 좋겠다. 상처를 받아도 언제 상처를 받았느냐며 열심히 사랑을 하고, 열심히 자기 사명을 다하는 사람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