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7시간 - 127 Hour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 감독 : 대니 보일 |
| 주연 : 제임스 프랭코, 리지 캐플란(2011) |
이 영화를 보고 있으려니 오래 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어떤 한 남자가 일을 하다가 냉동창고에 갇혔다. 바깥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안에서 문을 열고 나갈 방법이 없다. 더구나 그 시간은 동료들이 다 퇴근하고 나머지 자신에게 맡겨진 잔업을 하고 있던 상황이라 주위엔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순간 절망에 빠진 남자는 그대로 얼어 죽어 버렸고, 다음 날 동료에 의해서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확실히 그럴만도 하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영하 2,30도 되는 상황을 무엇으로 이기겠는가. 하지만 그의 죽음은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마침 그 창고는 고장이나 냉동이 가동 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결국 이 남자는 얼어 죽은 것이 아니라, 지레 겁을 먹고 절망감에 죽은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이 영화는 그 반대 선상에 있다. 이 남자는 그런 위기 상황에서 단 하루도 버티지 못했지만, 영화 속 주인공은 무려 5일하고도 7시간을 버텼다. 그것도 영화를 위해 일부러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실제로 2003년 미국 유타주에 있는 블루 존 캐년이라는 곳을 아론(제임스 프랭코 분)은 혼자 등반하다 그만 바위덩어리와 함께 굴러떨어져 암벽 사이에 끼면서 고립된다. 그것도 한쪽 손이 끼인채. 워낙에 외진 곳이라 도와줄 사람은 없다.
이 영화는 자연스럽게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와, 감독은 무엇으로 94분이란 러닝 타임을 이끌어갈까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거기엔 실화의 주인공이 견뎠을 127이란 실제적 시간은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만큼 영화는 영리하게 잘 짜여져 있다. 주어진 시간에서 보여줄 것만 보여주니까.

우선 난 저 상황이라면 몇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무엇보다 낮엔 그나마 견딜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밤이 주는 그 적막감과 공포를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것을 하룻밤도 아닌 다섯번의 밤을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맹수로부터의 습격도 공포의 대상이다. 그뿐인가, 손이 바위 사이에 끼었으니 그 고통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주인공은 이런 암벽 등반의 경험을 많이 해 본 사람이라 필요한 장비를 가지고 있다. 나도 그랬을까? 그것도 최소한일 것 같다. 로프와 칼, 목마를 때를 생각해 물통과 헤드 라이트, 소형 비디오 카메라까지.
사람은 위기 상황일수록 침착하라고 한다. 그럴 때 무조건 상황을 벗어나려고 소리치는데 기운을 빼면 안된다. 대신 그는 자신이 죽을 것을 생각해서 짬짬히 카메라에 자신의 이야기를 녹화해 놓고, 그러는 과정에서 자신의 지난 옛 일을 회상한다. 그것은 즐거울 수도 있고, 한없는 회한에 젖게도 만든다. 그건 나라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사랑하고, 좀 더 열심히 일하고, 좋은 일도 더 많이하며 살았을 텐데란 생각은 하나 같을 것이다. 또 아마도 그런 생각이 그 적막하고도 막연한 시간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물을 몇번에 나눠 마시며, 자신의 오줌조차 소중히 받아 갈증을 해결한다. 그것을 보니 오래 전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생존자 몇 명이 서로의 오줌을 나눠마시며 견뎠다는 그 얘기가 생각이 났다. 위기상황이 나쁘지만은 않는 건 역시 그런 알 수 없는 인류애 같은 것이 불쑥 나온다는 것일게다.
그리고 그런 위기상황 일수록 할 일은 더 많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계란으로 바위 깨기라고 그나마 가지고 있는 조그만 칼 가지고 바위 갈아 틈을 내어 손을 빼볼려고 안간힘다. 승부가 안 나는 게임 같지만, 개미 한 마리 지나다니는 구멍하나가 둑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 일이 전혀 어리석은 일마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쨌든 그 바위에서 몸을 빼내는대는 성공을 했다.
그런데 아뿔사! 손은 바위에 끼워둔 채 몸만 빠져 나왔다. 팔이 떨어져 나간다란 말이 있던데 액면 그대로의 상황이 된 것이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얼마나 황당할까? 자신의 팔은 저 바위에 여전히 끼어 있는데 살기 위해 그런 상황이 되어버리다니. 하긴, 팔과 함께 빠져 나왔더라도 이미 너무 오래 동안 그러고 있던 상태라 피가 통하지 않아 괴사가 일어났고 절단을 해야했을 것이다.
나는 갑자기 그 장면부터 충격을 받았고 만감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팔이 잘려 나갔을 때의 미식거림은 차치하고라도, 몸이 빠져 나왔다는 그 안도감 보단 과연 외팔이로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가 더 걱정되는 것은 또 뭐란 말인가.
그리고 주인공은 동굴 같은 곳을 벗어나기 위해 무조건 달렸다. 그곳을 빠져 나가는 것도 필요했지만 알에서 부화한 새끼 거북이 본능적으로 바다를 향해 달리듯, 그는 물이 있는 곳을 향해 달린 것이다. 달리면서 그의 표정은 한껏 고양되어 있다. "거봐. 나는 행운아라구. 죽는 줄만 알았지? 난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왜냐구? 난 행운아니까." 그 의기양양함이 얼굴에 가득하다. 하지만 그것도 물을 찾지 않으면 너무 이른 자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막같은 불루 존 캐년에서 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역시 행운은 그를 비껴가지 않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물웅덩이를 발견한다. 하지만 깨끗한 물웅덩이였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아쉬운 것은 그 물은 어찌보면 자신이 받아 마신 오줌 보다 못한 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그는 무조건 그 물웅덩이를 향해 힘껏 몸을 던진다. 그만큼 인간의 생존에 대한 욕구는 강렬하다. 그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누군가 토해 놓은 것을 주워 먹었다는 그 전설같은 이야기와 오버랩 되고, 어찌보면 그 보단 낫다는 생각도 든다. 까짓 거, 그렇게 더러우면 병원에 가서 위세척 한 번 해 주면 되는 일 아닌가.
아무튼 그는 그곳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는 그 후에도 암벽 등반을 했을지 모르겠다. 현실적으로 팔이 잘렸으니 불가능 했을 것이다. 내가 말하려 하는 건, 그가 팔이 잘리지 않았더라도 등반을 했을 것이냐는 것이다. 아마도 하지 않았을까?
인간은 왜 그렇게 자연에 몸을 맡기는지 모르겠다. 자연과 내가 하나되는 순간을 맛보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그 보단 더 궁극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를테면 인간은 자꾸 나를 증명하고픈 욕구가 있어서이기 때문은 아닐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니까. 그러려면 도전과 모험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게다가 그 모험과 도전에서 이기는 쾌감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도 조난을 감수하고라도 산을 자꾸만 오르려 하는 사람을 이해해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어찌됐건 그런 자연의 품을 혼자 가는 건 확실히 미련한 짓이다. 자신이 무슨 용가리 통뼈라구.
나중에 에필로그를 보니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잘 산다고 한다. 강연도 하면서. 역시 몸이 불구라고 해서 그 인생도 불구일 수는 없다.
별로 맞는 얘기 같지는 않지만, 순간 성경 말씀이 생각이 났다. 누구든지 눈이 죄를 짓거든 그 눈을 뽑아 버리라. 눈을 뽑아 버리고 불구인채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 보다 낫다고 했다. 행복은 바로 이런 것에 있지 않나 싶다. 뭐든지 생각하기 나름이란 말은 맞는 말 같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 순간 살기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런 인생에서의 행복을 어떻게 누렸겠는가.
이 영화를 보면서 인간은 절망의 존재일까, 희망의 존재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인간은 좋은 것을 받아들이기 보다 나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더 빠르다고 한다. 어려운 상황에서 절망을 느끼는 것이 희망을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빠르다. 하지만 인간의 목숨은 약한 것 같아도 질기다. 아무리 포기가 빠른 성격이라고 해도 누구도 자기 생의 마지막은 자신이 원하는 때 오길 바란다. 하지만 인생의 위기상황은 언제든지 올 수 있다. 거기서 살아남는 법은 꼭 배워야 한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는 절망부터 생각하지 말고,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자꾸 되내어라. 그리고 살길은 반드시 있다고 믿어라. 그러면 길은 반드시 있다. 이것이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은 아닐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고 해서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를 생각하면 안된다.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가 대부분 그렇지만, 이 영화는 유독 뮤직 비디오를 보는 것 같이 감각적으로 만들었다. 난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그는 30대일거라고 착각을 한다. 하긴, <트레인스포팅>을 만들었을 때만해도 그는 젊었다. 젊은 감독이 그런 영화를 만들면 감동은 그리 크지 않다. 그냥 재치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제 더 이상 젊지 않다. 하지만 그의 영화적 감각은 더 젊어진 느낌이다. 이제는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새삼 감동이 느껴지고, 경의를 표하고 싶어진다. 어쨌든 잘 만들었다. 강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