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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넘버 5 - 시대의 아이콘이 된 불멸의 향수
틸라 마쩨오 지음, 손주연 옮김 / 미래의창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누구나 갖고 싶어하고, 그래서 한병쯤 가지고 있는 향수가 이 샤넬넘버5가 아닐까 한다.
우리집에도 아주 오랜 옛날 이 향수가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물론 그때 나는 너무 어려서 해당사항이 없었고, 있다면 우리 엄마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향수가 어떻게 해서 우리집에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옛날의 남편들이 다 그렇듯 아내를 살갑게 챙겨주는 멋이 있어 아버지가 엄마에게 선물했을 리는 만무하고, 어쩌면 친척이나 지인 누군가가 선물을 해서 아버지 손에 들어온 것을 엄마에게 건네준 것 같다. 하지만 돼지 목의 진주라고, 엄마는 누구처럼 향수를 몸에 두를 줄 몰랐다. 엄마는 그저 평범한 여염집 아낙이었을 뿐이다. 그저 부엌 냄새, 밥 냄새가 더 익숙한. 더구나 이 향수의 농축된 냄새는 남자 스킨의 그것과 흡사해서 오히려 밥맛을 떨어트릴 수 있다고 해서 엄마는 쓰기를 거부했다. 게다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도 향수는 술집 여자나 화류계 여자가 쓰는 것으로 인식이 되어 있어서 더더욱 언감생심이었다. 그런데 왜 이 향수가 엄마의 화장대 서랍에 있게 된 걸까?
엄마가 향수를 쓸 줄 모르니 나 역시도 관심이 없었다. 아니 가지면 안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자그만 케이스 안에 들어있는 이 향수는 마치 양주병을 축소해 놓은 듯했고, 묘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빨리 어른이 돼서 이 향수를 한번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집에선 물 한방울의 가치도 없는 것이긴 하지만 과연 이것의 실제적 가치가 얼마만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가격은 얼마나 하는지, 외국에선 인기가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했다. 그만큼 샤넬넘버 5는 나나 우리 엄마와는 인연이 없는 향수였던 것 만큼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조그만 향수 하나가 갖는 위력은 대단해서 내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사이에도 활발하게 진화의 진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묘한 건, 내가 그것을 알게된 게 70년대 초중반 무렵이었고, 실제로 코코샤넬이 타계한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록 사람은 가고 없어도 오늘 날에도 향수의 살아있는 전설로 남아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한 향수랴! 물론 오랜 세월 그 명맥과 명성을 유지해 온 향수가 이 향수뿐이겠냐만 이것만큼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향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샤넬은 살아생전 폴 발레리의 말을 인용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향수를 잘못 사용하는 여자는 미래가 없는 여자"(83p)라고. 순간 약간의 뜨끔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차라리 잘됐다 싶기도 하다. 우리 엄마나 나나 샤넬넘버 5를 알았던 때는 굳이 이 말을 듣지 않아도 됐던 때였으니까. 하지만 오늘날은 어떤가? 확실히 저 말을 쉬 무시할 수 없는 세대를 살고 있다. 소위 말하는 감성의 세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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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향수를 쓰기 시작한 건 최근 3,4년쯤 된다. 고백하지만 나는 참 오래도록 향수를 사용할 줄 몰랐다. 사람 냄새만큼 좋은 냄새가 또 있을까? 또 사람 냄새만큼 역겨운 냄새가 또 있을까? 버스를 타고 또는 길거리를 스치는 사람에게서 나는 향수내는 아무래도 인위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유혹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향수를 멀리했다. 가진 것도, 든 것도 없으면서 사람이나 유혹하는 그런 사람으로 오인 받고 싶지 않아서.
20년 전쯤이었을까? 생일 선물로 향수 선물 세트를 아는 지인으로부터 선물을 받았었다. 가지고 있기도 뭐하고, 남 주자니 아깝고 그러다 어느 틈엔가 처박아 놓은 것을 언젠가 꺼내 보았더니 증발되어 얼룩만 남아 있는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밀폐된 용기에 담아 놓아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었나 보다.
그러다 정말 아주 우연히 향수를 쓰기 시작했다. 샤넬넘버 5는 아니고, 이름 모를 아니 알았는데 향수에 문외한이다 보니 그 이름을 잊어버린, 용기도 냄새도 매혹적인 향수다. 어찌보면 목이 긴 여인을 닮은 것도 같고, 느낌표 !를 거꾸로 이어 만든 듯한 고혹적인 향수다. 내가 이럴 내 돈 주고 샀을리는 없고 분명 선물 받았다.
내가 이걸 바르며 깨달았던 건 꼭 반드시 사람을 유혹하기 위해 향수를 쓰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너무나 은은해서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고, 사람이 나에게 굳이 가까이 오지 않으면(정말 굳이 포옹이나 키스를 할만한 거리가 아니면) 맡지 못할 그런 향기다. 그러니까 이건 타인은 둘째치고 먼저는 온전히 내가 즐길 수 있는 향기였다. 그러니까 일차적으론 내 코가 먼저 매료되어야 한다. 이는 내가 먼저 매료되지 않으면 누구도 매료시킬 수 없다는 묘한 확신을 주는 향기였고 그것이 곧 향수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선 부적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뭔가 모르게 나 자신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을 갖게 만드는. 그래서 세기의 여신 마를린 몬로는 샤넬넘버 5외엔 아무것도 입지 않는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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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샤넬이 당대 유명한 패션디자이너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그 보다는 향수에 대한 각인이 더 크지않나 싶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로 사용하는 것엔 이의가 없지만 왜 이름뒤에 No 5를 사용했을까는 의문이긴 했다. 그것은 그녀의 전기 영화에도 잘 다루어지지 않고 있어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책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 궁금증이 풀렸다. 책에선 그녀가 넘버 5를 붙인 것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한 가지 이유일 수만은 없고,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넘버 5를 붙인 거라고 봐야 옳을 것 같다.
그것은, 오각형 별과 인간 신체의 비율이 같다던 피타고라스의 황금비율과 같기 때문이기도 하고, 샤넬은 오바진이라고 하는 수도원에 있는 고아원 출신인데, 그녀는 그곳 복도에서 숫자 5의 패턴을 발견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가톨릭 분파에서 숫자 5는 사물이 지닌 본질의 순수함과 완벽함을 구현한 숫자이기도 하고,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녀가 숫자 5를 좋아하다 못해 숭배하기까지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하니, 그녀가 넘버 5를 붙이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란 오바진 수도원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에 의해 맡겨진 그곳은 넘버 5가 탄생할만한 모태요 요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바진은 코코 샤넬의 순수함과 미니멀리즘에 대한 강박적인 미학을 형성하는 핵심이었다. 그녀가 디자인한 드레스와 그녀의 삶의 방식을 형성하도록, 그리고 더 이상 심오할 수 없을 정도의 미학을 지닌 위대한 향수 샤넬 No 5를 창조하도록 이끌어 주었다.(24쪽)
이 건물은 또한 코코 샤넬의 생애, 그리고 샤넬 No 5의 생애 과정을 형성하는 메타포들로 가득 차 있다. 오바진이라는 세상 어디에나 향수와 향수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상징들이 있었다.(25쪽)
그러나 샤넬은 자신이 오바진 출신이라는 것을 일생동안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왜 그랬는지는 짐작은 간다. 누구도 자신의 불행한 과거와 그것들이 서려있는 곳을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이 그녀의 미학의 고향이라고 하니 그녀가 수도원에 맡겨진 것이 종국엔 아주 불행한 것만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또, 이미 영화나 전기를 접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녀는 고아(원) 출신이었던만큼 하층민의 삶을 살기도 했다. 그녀는 쇼걸 출신이었고, 한때는 모자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하지만 늘 상류층의 삶을 갈망했고, 모든 여자의 꿈이 다 그렇듯 그녀 역시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며 사는 것을 꿈꿨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일생을 통해서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신분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이것은 그녀에게 적지않은 열등감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열등감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야망도 큰 법이다. 그래야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것은 몇번인가의 사랑에서 증명해 보고 싶은 것이지만 애석하게도 매번 그녀의 사랑은 그녀를 증명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랑에 실패할 때마다 일에 더욱 매진하는 그녀를 볼 수가 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문득, 타인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말을 되내이곤 했다. 어쩌면 인류의 발명품의 거의 대부분은 그 누군가의 불행 때문에 생겨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코코 샤넬이 역시 사랑에 성공했다면 과연 샤넬넘버 5라는 향수를 만들 수 있었겠으며, 그것이 최고의 향수라고 인정 받을 수 있었겠는가? 말하자면, 샤넬넘버 5 한방울은 그녀의 눈물이며, 그녀의 열망이 농축되어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볼 때 신은 공평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때로 열등감이 힘이 될 때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히려 사람의 부러움과 질투를 사게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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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책은 코코샤넬의 전기에 관한 책은 아니다. 오히려 샤넬넘버 5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과 그것이 어떻게 대중적 성공을 거두고 향수의 역사가 될 수 있었는가를 추적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이젠 향수 보다 더 잘 알려진 그녀의 생애 때문에 이처럼 그녀의 삶을 되씹게 되는 것 같다. 그래도 이책은 저자의 꼼꼼하고도 입체적인 저술 때문에 일종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하지만 그런 저자의 강한 의지 때문일까? 약간 산만하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하지만 대체로 잘 쓴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부러움은 있다. 앞에서도 썼지만, 샤넬이 향수를 바라보는 안목과 그것에 대한 열망(과 야망)이다. 인간이 한 세상을 살면서 둘 중의 하나는 꼭 이루어야 하는 것 같다. 평생 품을 수 없는 사랑을 이루어 내던가, 일에서 자신을 뛰어넘던가. 역사상 사랑과 일을 함께 이루어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게 볼 때 샤넬은 다분히 후자쪽이다. 누구는, 사랑은 잠시뿐이다. 일에서 부와 명성을 이루는 것이 훨씬 값진 일이라고 쉽게 단정지어서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있 없는 문제다. 그녀가 샤넬넘버 5를 반열에 올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영욕의 세월을 필요로 했는지를 안다면 말이다.
이책은 매혹적이기도 하지만 지난하기도 하다. 한번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