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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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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손철주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는데, 부끄럽게도 난 이제야 그의 글맛을 보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책날개에 저자 소개가 재밌다. '한시와 꽃. 그림과 붓 글씨, 한 잔 술이 있으면 썩 잘 노는 사람'이라 한다. 그래서 그럴까? 이 책을 펼쳐들면 몇 가지 사실에 놀란다. 우선, 한 잔 술이 있으면 잘 논다라고 했는데, 그럼 저자는 꽤 달변일 것 같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일단 술김을 빌어 한 가지에 대해 1박2일도 풀어놓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런 달변이라면 글도 온갖 미사여구와 질펀한 문장력을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기획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글은 의외로 압축적이고, 군더더기가 없다.   그리고 또 놀라운 것은, 그는 한시에 조예가 깊다는 것이다. 우리 옛 그림 어떤 것이 나와도 그것을 한시와 잘 조화시켜 그럴 듯한 설명을 곁들인다.  그러고 보면 우리 그림을 이해하려면 한시에도 능통해야 하는가 보다. 그래서일까? 그의 어휘력에 또 한 번 놀란다. 이런 숨은 어휘가 있었구나. 그것에 대한 꼼꼼한 각주가 돋보이는 것이다.  

이 책은 총 4장으로 되어 있는데, 1년 사계절을 의미해 그에 따른 우리 옛 그림을 소개하고 있다. 사계절이 1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리네 인생과도 흡사해 보면 볼수록 깊이를 더해가는 느낌이다.  나 역시도 나이들수록 똑같은 느낌으로 한 계절, 한 계절을 보내고 맞이할 수 없음을 절감한다. 

 

꽃몸살이라는 것이 있단다. 이건 또 이 책에서 처음 안 사실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몸살 끝에 꽃이 핀다는 뜻이 숨어 있단다. 봄이 오면 노인이 앓는다하여, 이것을 춘수라고 한단다. 춘수에는 약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엄마의 노년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는 나는, 엄마가 몇년 전부터 한 해 걸러 한번씩 이 계절에 꼭 호되게 앓는 것을 지켜볼 수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춘수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왜 다른 계절 다 놔두고 봄만되면 그러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그땐 약도 안 받는다. 속이 쓰려 더 이상 못 먹겠다며 생으로 앓고 일어 나시는 것이다. 만물이 생각하는 계절이라는 건 정말 듣기 좋은 말 같다. 그럴 때면 엄마는 늙느라고 그런다고 말씀하시곤 한다.  난 그저 그 곁에서 이번에도 잘 견뎌내길 마음 속으로 고대할 뿐이다. 아무튼 이것을, 저자는 18세기 화가 정선의 <꽃 아래서 취해>란 그림과 함께 늙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한미디로, 술에 취해 널부러져 있는 느낌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것은 짝이 없어 꽃과 더불어 대작을 했다(21p)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인지, 핑곈지 모르겠다.

예전에 나는 여름이 되는 것을 봄이 되는 것보다 더 좋아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차라리 봄이 낫다 싶다. 지내기도 여름보다 한결 좋을 뿐만 아니라, 여름은 더위도 더위지만 어느 정점에서면 곧 가을이 올 것을 생각해야 하고, 한 해의 스러짐을 지켜볼 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봄이 더 좋은 것이다. 그러나 같이 사는 노인네의 춘수를 지켜봐야 한다는 이 복병이 숨어 있는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이들면 들수록 그리움이 많아진다는 것을 아는 나이니, 나는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젊다고 우쭐댈 나이는 이미 지났다. 하지만 엄마가 봄이면 앓고 나는 그 춘수속에 젊을 때의 그리움이 뼈에 사무쳐 있을 지 누가 알겠는가?  

사실 봄엔 꼭 춘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역시 같은 세기의 또 다른 화가 심사정의 <양귀비와 별 나비>를 들어 봄의 황홀함을 말하고 있다. 정말 양귀비꽃에 살포시 내려와 앉을 것만 같은 그림이 사실적이다. 사실 연애를 봄에 비유하기도 하지 않는가? 그 그림이 그것을 연상케도 한다. 하지만 아뿔사! 양귀비의 꽃말은 '덧없는 사랑'이란다. 그러면서 이규보의 시를 한 수 읊는다. 

꽃 심을 때 안 필까 걱정하고
꽃 필 때 질까 또 맘 졸이네
피고 짐이 다 시름겨우니
꽃 심은 즐거움 알 수 없어라  

                                                  - 꽃 심기- 

인간의 사랑이 이런 마음일까? 하지만 인생을 이 시에 비유해도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사랑할 땐 사랑을 모른다고 했던 얼추 이상은의 노래도 생각이 난다. 사랑할 땐 사랑만하면 좋겠다. 덧없을 것을 미리부터 걱정하지 말고. 하긴, 문학이 어느 만큼은 허무주의를 내포하고 있느니만큼, 사랑에도 독이 있다고 사랑을 못할까? 

여름  

요즘의 여름은 예전의 여름과 조금 달라졌다는 느낌이 든다. 이것은 비단 내가 나이를 먹어서마는 아닐 것이다. 정말 지구 온난화의 값을 톡톡히 한다싶으리만치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특히 요즘의 장마를 들어 차라리 우기라고 표현해도 되리만큼 비가 많이 오고 있다. 옛날의 여름도 이랬을까 싶기도 하다.  

저자가 길어 올린 여름 그림 몇 점은 시원하다기 보단 풍유스럽다는 생각을 해 본다. 신윤복이 그렸다던 <연못가의 여인>은 아무리 사람을 유혹해야 먹고 살 수 있는 기녀도 더위 앞에는 체면이고, 고혹적인 자태도 필요없는지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는 폼이 우습기도 하다. 그래서 저자 역시도 그림 속 기녀를 가리켜 조선판 '쩍벌녀'라고 쓰고 있다. 더위를 이길 미녀도 장사도 없을 듯하다. 또한 17세기 홍진구의 작품 <오이를 진 고슴도치>는 마치 고슴도치가 오이를 서리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것을 등에 지고 제 집으로 돌아가 새끼와 함께 나눠 먹을까? 고슴도치도 제 새끼를 위할 줄 안다는 말이 여기서도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김홍도의 <포의풍류도>는 선비집의 인테리어를 설명하기 위해 쓰이기도 했는데, 어쩐지 약간의 유머스러움이 베어 있다는 느낌이고, 더우면 무조건 에어컨부터 틀어대 냉방병을 키우는 현대인을 생각하면 반성해야 할 것도 같다. 이 냉방병이란 현대의 듣도 보도 못한 병을 김홍도나 비파를 들고 있는 그림속 저 선비는 뭐라고 꼬집을까? 더우면 차라리 악기를 타는 것으로 잊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 같기도 하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이 쳅터에서의 압권은 김두량(18세기)이 그렸다던 <긁는 개>가 아닐까 싶다. 여름을 견디기 힘든 건 사람만은 아니다. 인간과 가장 가깝게 생활하는 개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게다가 여름은 견공들의 수난의 계절이기도 하지 않는가? 올해는 또 몇 마리의 개가 수난을 당할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저 그림 정말 잘 그리지 않았는가? 보는 순간 킥킥 웃음도 났다. 이런 사랑스러운 개와 함께 이심전심으로 남은 여름도 잘 견뎠으면 좋겠다. 잡아 잡수실 생각만 하지 말고. 

가을 

가을을 상징하는 사물들은 의외로 많을 것이다. 정조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군주라는 건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그린 <들국화> 수묵 한 점은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흔히하는 시쳇말로 이 분이 못하시는 게 뭘까? 다시 한 번 경외감이 든다. 김두량은 '긁는 개'를 그렸지만, 김득신은 <짖는 개>를 그렸는데 풍경화 속의 하나로 그려냈다. 난 그저 개만 보면 좋다.  

  

봄과 가을은 역시 사랑의 계절인가 보다. 봄은 남자가 사랑하기에 좋은 계절인가? 가을은 여자가 사랑하고픈 계절이라고 생각했는지, 저자는 위의 그림을 가을에 배치해 놨다. 이 그림은 작자 미상의 <서생과 처녀>다. 이 그림을 보니 베시시 웃음이 나온다. 그림 자체도 그렇지만 나의 지난 날 이루지 못한 사랑이 생각나 마음을 사알짝 들킨 것도 같아서.  저 그림을 보니 서생을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는 처녀의 심경을 드러낸 것 같다. 그렇다면 '처녀와 서생'이라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여자가 어떤 사랑을 퍼부어대도 왠지 남자는 조금도 마음을 줄 것 같지 않다. 이럴 때 여자의 마음은 그야말로 애간장이 탄다. 그것을 저자는, '연기 없는 타는 가슴'이란 제목으로 설명했는데, (아무리 조선사회가 보수적 신분사회라고는 하지만) 왜 여자가 먼저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일까? 저 시대를 돌아가 일방적으로 목매달지만 말고 방법을 써 보라고 조언하고 싶어진다. 물론 사랑에 대해 뭣도 모르면서.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 개츠비가 왜 위대한가를 새삼 알았다. "사랑에 실패해도 다시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능력, 즉 이것을 고 장영희 교수는, 언제라도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낭만적 준비성'이라고 했다.(장영희, '문학의 숲을 거닐다', 64p) 비록 사랑에 실패하더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이(그것이 다른 상대가 되어도) 거절 당할까봐 사랑을 하지 않겠다는 사람 보다 훨씬 낫다고 말하고 싶다. 그대여, 꼭 사랑을 이루시기를! 

겨울           

겨울은 여름 못지 않게 사나운 계절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책의 겨울편을 보면, 겨울은 또 겨울 나름의 상징과 낭만이 있는 거구나,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추워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얼어 죽을 것 같아도, 분명 언 땅속에 생명이 잠을 자고 있고, 눈 내린 잔가지에도 봄이면 어김없이 꽃을 피워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저자는 겨울에, 정선이 그림 <솟구치는 물고기>란 그림을 배치했는데,  글쎄, 왜 잉어일까? 진짜 기운이 좋아 수면을 폴짝 뛰어 오를 것만 같다.  이게 또 어찌보면 맞는 배치 일까 싶기도 한데,  저자의 말에 따르면, 원래 우리 민화를 보면, 용으로 변신하는 잉어그림이 많다고 한다. 그것은 또 높은 벼슬길에 오르기를 바라는 길상도라고 한다.  

물고기 어(漁)에는 나머지 여(餘)와 중국어 발음이 같다고 한다. 물고기는 여유를 상징한다고 한다. 세 마리를 그리면 '삼여(三餘)'를 뜻한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건 핑계다. 세 가지 여유만 있으면 충분하다. 곧 하루의 나머지인 밤, 일년의 나머지인 겨울, 맑은 날의 나머지인 흐린 날, 이 삼여는 독서하기에 알맞다고 했다.(262p~263p) 이 글을 읽으니 마음이 찔린다. 그렇게 해서 벼슬에 오른 사람도 없지 안겠건만 나는 너무 안일하게 독서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겨울은 뭐니 뭐니해도 농한기 때도 방안에서 물래돌리고, 길쌈하고, 책도 읽은 김홍도의 <자리 짜기>같은 부지런함이 베어있는 우리 민족의 부지런함의 풍경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것을 저자는 '다복함이 깃드는 집안'이라고 했다.  

겨울은 아무리 추워도 약속의 계절이다. 명년엔 다 나아지기를 바라고 다짐하고, 복을 비는 계절. 봄에 꼭 꽃을 피워낼 거라고 약속하는 계절. 그래서 우리는 또 겨울을 살아내고, 1년을 살아내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니 새삼 우리 그림에 담긴 깊은 뜻과 해학이 보여 즐거웠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리 그림만이 갖는 필치가 친근감을 더한다. 다시 말하지만, 저자 손철주의 해설도 좋고. 추천해도 좋을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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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7-11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그림을 소개하는 책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제가 좋은 책을
못 찾는데다가 아직 동양화에 대해서 모르는게 많거든요. 그래서 우리나라 그림에
대한 글이라면 그 중에 오주석 선생의 글을 좋아했어요. 스텔라님의 글을 읽고나니
이 책 읽고 싶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