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탄 유골·돌무더기… 
헬레네 빼앗긴 스파르타 대신 미케네가 전쟁을 주도한 것은
청동 제작원료인 주석을 트로이에서 확보하기 위해…



1871년 세계는 고대 그리스의 절세미인 헬레네의 부활을 목격했다. 어린 시절부터 일리아드에 심취했던 독일의 부유한 기업가 하인리히 슐리만이 터키 북쪽 히살리크의 언덕에서 헬레네에 어울릴 만한 고대 트로이의 화려한 장신구들을 대량 발굴한 것. 과연 호메로스가 노래한 트로이는 역사적 사실인가.

슐리만의 발굴은 틀렸다

히살리크 언덕에서는 선사시대부터 로마제국 말기까지 적어도 9개 도시가 전쟁이나 지진으로 명멸했다. 도시가 멸망하면 다시 그 위에 새로운 도시가 세워진다. 그러므로 히살리크 언덕에는 9개의 도시 유적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슐리만은 아파트 15층 높이의 유적층에서 겨우 한두 층을 발굴했던 것이다. 1998년부터 독일 튀빙겐대의 만프레드 코프만 교수와 미국 신시내티대의 브라이언 로즈 교수는 50여년 동안 중단됐던 트로이 발굴을 재개했다. 여기서 호메로스가 노래한 그대로인 높이 8m의 거대한 성채와 망루가 발굴됐다.

트로이의 성문은 열려 있었다

그런데 새로 발굴된 성채에서는 그리스 연합군이 그토록 열고 싶어 하던 성문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왜 성문이 없었을까? 이 미스터리는 성채를 둘러싼 외곽 도시가 발굴되면서 해결됐다. 연구팀은 성채를 둘러싼 도시의 외부 경계선에서 적군의 전차를 막기 위한 700미터에 이르는 깊은 도랑을 발견했다. 또한 불탄 유골과 마지막 저항에 사용했을 돌무더기 등이 트로이 최후의 날을 증명해줬다. 외곽 도시까지 포함해 트로이의 인구는 당시로선 거대도시 규모인 4000~8000명이었다.

전쟁의 원인은 청동제 무기


▲ 트로이 유적에서 발견된 각종 토기와 술잔들. 금빛 찬란한 모습에서 당시의 영화를 짐작할 수 있다.

헬레네를 빼앗긴 스파르타도 아닌 미케네가 전쟁을 주도한 이유는 청동제 무기였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다. 미국 텍사스 A&M대의 케말 풀락 교수 연구팀은 1984년부터 1994년까지 터키 앞바다에서 트로이 당시의 침몰선을 발굴했다. 이 배에서는 11톤의 청동을 만들 수 있는 금속 주괴가 발견됐으며 화려한 금장신구와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타조알도 발견됐다. 서구와 아시아를 잇는 다르다넬스 해협에 인접한 트로이는 말 그대로 세계 무역의 중심지였던 것. 반면 그리스 최강의 군대를 유지하고 있던 미케네에는 청동을 제조하는 데 필요한 주석이 나지 않았다. 미케네가 이런 트로이를 그냥 뒀다면 더 이상했을 일이다.

파리스는 실존 인물

당시 터키를 지배하고 있던 히타이트 제국의 석판 기록에서는 윌루샤(Wilusha) 해안에서 미케네가 연루된 분쟁이 있었다는 문구가 나온다. 고고학자들은 윌루샤가 트로이의 다른 그리스어 이름인 윌레오스(Wileos)일 것으로 믿고 있다. 석판에는 히타이트의 군대가 트로이가 위치한 터키 북부로 이동했다는 내용이나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의 또 다른 이름인 알렉산드로스도 등장한다.

한편 히타이트의 기록에서는 윌슈아의 수로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최근 발굴된 트로이의 수로 벽면에 달라붙은 석회암 성분을 조사한 결과 기원전 2600년부터 이 수로에 물이 흘렀음을 알 수 있었다. 히타이트의 기록에 나온 윌슈아와 트로이가 다시 일치하는 순간이다.

(이영완기자 ywlee@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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