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꼽을 수 있다. 근대 민주주의 시대를 연 이 혁명의 원인을 놓고, 계몽 사상가들이 제시한 인민주권론의 영향이나 부르주아 계급의 발흥, 프랑스 평민들의 기아 사태 등을 제시하지만, 루이 16세 왕실의 사치와 방탕도 결정적으로 한 몫 했다.

앙투아네트는 그런 왕실의 추문을 한 몸에 뒤집어썼다.

다 알다시피, 오스트리아 황실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딸로 태어난 앙투아네트 공주는 1770년 루이 16세와 혼인했고, 1774년 18세로 왕비가 되었다. 1776년 첫 아이를 낳은 뒤 그녀는 노름과 사치에 빠져들었다.

대중의 평판이 좋을 리 없는 가운데 1783년 루브르 궁에서 열린 살롱 전시회에 출품됐던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는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그림 속의 그녀는 당시 영국에서 유행했던 흰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채 손에 장미꽃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파리에서 모슬린 드레스는 ‘속옷’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옷차림을 한 왕비의 초상화는 대중들에게 음탕한 여자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이미 시중에는 왕비가 색녀이고, 루이 16세의 정력을 소진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온갖 남자들을 침실로 불러들인다는 내용을 직설적으로 묘사한 책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 뤼사르스키가 그린 36세의 마리 앙투아네트. 프랑스 혁명기에
그린 이 그림은 끝내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를 둘러싼 희대의 사기극이 터지면서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앙투아네트의 입장에서는 억울했던 사기극은 이른바 ‘왕비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으로 불린다.

몰락한 귀족 집안 출신인 라 모트 백작 부인은 평소 왕비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던 로앙 추기경에게 접근, 왕비가 거액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려고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원래 루이 15세에게 팔려고 보석상이 만든 목걸이였지만, 루이 15세가 천연두에 걸린 소녀와의 성관계로 얻은 병 때문에 사망한 바람에 팔지 못했다.

루이 16세의 왕실은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하느라고 재정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사치를 좋아하는 왕비라도 구매력이 없었다. 그러나 라 모트 백작 부인이 거짓으로 꾸민 왕비의 편지에 속은 로앙 추기경은 보석값을 대신 지급했고, 그것을 라 모트 백작부인의 하수인에게 맡겼다. 추기경은 왕비가 목걸이를 받았을텐데도 아무런 내색을 비치지 않자 자신이 사기를 당했음을 알게 됐고, 그 소문이 왕실에도 들어갔다.

사기범들과 추기경이 재판에 회부됐지만, 대중은 오히려 사기극의 엉뚱한 피해자였던 왕비를 비난했고, 사기범들에게 환호를 보냈다. 그만큼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상황이었고, 프랑스 대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다.

국내 학계에서 대표적인 프랑스 문화사 연구자인 주명철 교수(교원대)가 쓴 이 책은 당시의 고문서를 일일이 뒤져 혁명 이전 시대에 앙투아네트가 어떻게 ‘소문의 벽’에 갇혔는가를 재구성했다. 차마 입에 올리기에도 민망한 육담으로 꾸며진 문학 작품부터 재판 기록, 후대 역사학자들의 평전들을 두루 참조해 앙투아네트의 실제 사치상도 지적하지만, 그녀가 중상모략과 헛소문의 피해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제시했다.

역사는 사실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그 사실에 덧씌워진 신화와 허구를 벗겨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다시 쓰일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하는 책이다.

(박해현기자 hhpark@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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