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연히 교회 서점을 들어갔다가 작년 9월 작고한 옥한흠 목사님의 아들 옥성호씨를 봤다. 그는 최근 그의 아버지 옥한흠 목사님에 관한 책을 냈고, 책을 산 사람에게 사인을 해 주기 위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여느 작가라면 사인회를 한다고 광고도 하고, 날잡아 큰 서점에서 거창하게 했을텐데, 그는 그야말로 소리 소문 없이 한 거나 다름 없었다. 그런 것을 보면 평소 거창한 것을 싫어한 옥한흠 목사님과 판박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냥 소박하게 자신과 같은 교회 나가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봉사라고나 할까? 덕분에 나도 다른 책을 사러 들어갔다가 하필 돈도 넉넉치 못해 예정한 책은 후에 사기로 하고, 냉큼 이 책을 사 그의 친필 사인을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 책이 나왔다고 했을 때 사 볼 생각이었는데 잘 됐다 싶기도 했다.
사실 옥성호씨는 그의 아버지 옥한흠 목사님의 장례를 인터넷으로 생중계를 했을 때 본 적이 있다. 고인의 장남이었던만큼 장례가 끝나갈 무렵 가족을 대표하여 참석한 내빈들에게 인사를 했었다. 요즘 흔한 헤어스프레이나 무스도 안 바른 더벅머리에 검은테 안경을 쓴 것이 영낙 없는 공부벌레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버지만큼이나 날이 선 성격이고 보면 판사나 검사 같이도 보인다. 그런 그가 인사를 했을 때 유머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혹시라도 아버님의 작고가 교인들에게 누가 될까봐 오히려 강한 모습으로 참석한 이들을 격려해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그런 그를 어제 사인을 받을 때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건 어찌보면 나에겐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그는 나와 같은 또래다. 20년 전, 내가 사랑의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 나는 청년부에 들어 갔었고, 같은 또래 끼리 모이는 모임에서 옥한흠 목사님의 큰 아드님이 우리가 같은 또래라는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옥한흠 목사님은 살아생전 가족들에 관해선 거의 언급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였을까? 말만 그렇게 들었을 뿐 그가 아버지의 교회를 다녔을지조차 의문스럽게 그의 모습을 본적이 없다. 하지만 목사님의 둘째와 세째 아드님은 봐서 알고 있다. 둘째 아들은 한때 나와 주일학교 교사를 같이 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를 만나기까지는 20년의 세월이 걸렸다고나 할까?ㅋ 뭐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옥한흠 목사님이야 워낙에 기독교계에선 존경받은 분이시기도 하니 웬지 목사님을 알면 그의 가족들도 다 아는 것처럼 착각이 들기도 한다. 단지 안타까운 건 그들은 나를 모른다는 것이겠지만.



또 하나 행운인 것은, 그는 유명한 <부족한 기독교 3부작 시리즈>의 저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오늘 날 위기에 처해있는 한국의 기독교의 문제점을 비판한 책으로 유명하다. 또한 기독교계에선 존경과 신망을 얻는 목사의 아들이 썼다는 점에서 출간 당시부터 상당한 주목을 받았던 책이기도 하다.
이러면 얼핏 아버지를 욕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겠지만, 저자는 오늘 날의 기독교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정확히 짚어냈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합격점을 받았고, 오히려 아버지 옥한흠 목사님 스스로가 아들의 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린 것으로 더 유명하다. 사실 그것은 나에게도 좋은 모습으로 보였다. 그것은, 그런 저자의 책을 아버지가 홍보했다는 것 보다, 오늘 날 기독교는 비기독교 진영에서 더 많이 비판을 받는데, 나는 그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같은 기독교 진영이라야 맞는 것 아닌가? 비기독교는 그야말로 비판만하고 비난만 한다. 그것은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비판만하고, 비난만 할 뿐이지 이렇다할 대안도 각성도 촉구하지도 않는다. 비판을 위한 비판, 비난을 위한 비난이야 누군들 못하겠는가? 나는 그들이 과연 기독교에 관해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떠드는 것이 맞는 일인가? 의문스럽다. 그러나 유명한 목사의 아들이란 걸 떠나서, 같은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이런 책을 썼을 땐 비판만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각성을 촉구하는 의도가 더 많이 들어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과 관련해서 기억나는 건, 작년 이 맘 때 오랜만에 교회 청년부 때 같은 또래 친구들을 만났다. 이런 저런 사는 얘기를 나누다 마침 옥한흠 목사와 그의 아들 옥성호씨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요는, 옥함흠 목사님은 그렇게 복음주의 설교를 열심히 하는데, 그의 아들은 교회를 비판하는 책을 썼다고 나름 희화하면서 깔깔대고 웃는 것이었다. 그것이 나에겐 얼마나 이상하고 어색한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같으면서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걸까? 그점에 있어서는 그들은 아직 생각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튼 실제로 본 그는 인터넷 화면에서 본 것 보다 조금 더 나이들어 보이고, 거칠어도 보인다. 사실 서점엔 그다지 사람이 많지가 않았는데 거기에 사람이 많았더라면 사인하느라 바빴을텐데 자신의 책을 앞에 쌓아놓고 오도카니 앉아있는 그의 모습이 다소 쓸쓸해 보였다. 손이라도 잡아주며, 같은 또래예요. 라고 말이라도 건네주고 싶었고, 사모님(옥한흠 목사님 사모)은 안녕하시냐고 묻고도 싶었다(정말 그 말이 목구멍 끝에 걸렸다). 하지만 나는 끝내 아무 말도 못하고 사인만 받은 체 거기를 나와야 했다. 사인을 받는 것 그 이상의 태도를 취한다는 건 또 얼마나 우습고, 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인가?
지금까지 저자들의 사인을 많이 받아 온 것은 아니지만, 사인을 하는 저자들은 모습은 대체로 진지하고, 겸손하고, 때로는 상냥하기도 하다. 하지만 또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 그런데, 사인을 받는 그 짧은 순간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람이 있다면, 하나는 노벨문학상의 르 클레지오의 사인을 받을 때이고, 또 하나는 어제 옥성호씨의 사인을 받을 때가 아닌가 한다. 르 클레지오는 무엇보다 상당히 진지하다. 그는 사인을 받으러 온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진지하게 소리내어 본다. 그 발음은 또 얼마나 어색할 것인가? 그래도 그렇게 함으로 그날 모인 독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느껴보고 싶어하는 열망 내지는 호기심 같은 것이 스며있다. 또한 그의 유난히 맑아보이는 회색빛 눈동자도 인상적이고. 그리고 옥성호 씨는 얼듯 볼 땐 차가운 것 같지만 상당히 겸손했다. 난 그저 "안녕하세요?"하며 방금 산 그의 책을 내밀었는데, 그는 더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나의 인사를 받아줬고, 힘있게 사인을 했으며, 안녕히 가시라고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면 정말 존중 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어찌보면 진지함과 겸손함은 한 줄기에서 나오는 인간의 가장 탁월한 태도는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저자의 책을 받고 나오는데 콧 끝이 찡했다. 이제 옥한흠 목사님이 돌아가신지 햇수로 7개월째다. 아직도 그게 잘 인정이 안 된다. 아직도 그분이 목회하셨던 교회엔 저리도 교인들이 북적이는데 저 많은 사람들 중에 옥한흠 목사님은 안 계시다니. 쓸쓸함이 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