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적 열정
레이 초우 지음/ 정재서 옮김/ 이산/ 360쪽


▲ 원시적 열정/ 레이 초우 지음
‘붉은 수수밭’의 노을보다 더 뜨거운 붉은 밭이 나오지 않았다면, ‘국두’의 용광로보다 더 위험해 보이는 거대한 염색통이 나오지 않았다면, 1990년대 초 전 세계에 중국 영화 바람이 불 수 있었을까. 장이머우 감독은 ‘국두’의 원작 소설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염색공장이라는 배경을 선택함으로써 중국 영화가 시각을 매혹하는 상품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 포장술은 동양을 바라보는 서구의 시각을 전제로 만들어진 일종의 ‘동양적 마케팅’의 결과물이다.

홍콩의 비교문학자 레이 초우의 ‘원시적 열정’은 중국 근현대 과정에서 영화가 어떻게 ‘중국’ 스스로를 규정해 왔는가를 조목조목 풀어냈다. 저자는 러일전쟁 후 중국이 근대의 문턱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을 중국에서 문자의 시대가 가고 이미지의 시대가 왔다고 규정한다. 체제와 갈등을 빚은 5세대 영화는 물론 공산당 체제하에서 만들어진 중국 영화까지를 포괄, 그 안에서 ‘원시적’ 관심사라 할 만한 땅과 민족주의, 여성 억압과 착취, 전통과 관습 등에 대한 균열적 시각을 포착해냈다.

물론 집중적으로 다룬 것은 세계적 지지를 받았던 5세대 감독 장이머우와 첸 카이거의 영화다. 두 감독을 비교하는 대목은 꽤 흥미진진하다. 장이머우의 영화 ‘국두’ ‘홍등’ ‘붉은 수수밭’의 여성 캐릭터는 성적으로 남성을 자극하는 신체를 지니고 있지만, 사회 혹은 가족의 굴레에 얽매어 있는 희생자다. 억압을 받으며 동시에 성적 에너지로 충만한 여성 캐릭터는 남성 중심, 서양 중심의 팬터지를 자극한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첸 카이거의 영화에서 여성은 신비화된 이상적 존재다. ‘황토지’에서 현실을 바꾸려 했던 여성은 자살하고, ‘현 위의 인생’ 속 여자들은 지극한 모성애를 가졌거나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자살한다. 물론 이들 영화는 반(反)페미니스트적·오리엔탈리즘적 취향에 가깝지만, 바로 그런 입장은 서양 시각과 중국의 현실을 의식한 일종의 ‘패러디’라는 해석이다. 미국 근대언어협회(MLA)에서 수여하는 ‘제임스 러셀 로웰’상을 아시아 관련서, 영화 관련서로는 처음 수상했다.

(박은주기자 zeeny@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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