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중왕’ ‘벤허’에선 사랑과 용서의 신성한 이미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등 고뇌하는 인간 모습 담아


지난 2일 국내 개봉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예수의 인생 마지막 12시간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12제자와 최후의 만찬을 마친 예수가 기도를 하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 올랐을 때부터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숨을 거둘 때까지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로마 병사로부터 매질 당하는 장면은 20여분에 걸쳐 묘사된다. ‘브레이브 하트’로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던 멜 깁슨이 감독과 제작을 함께 맡았고, 미국 텍사스의 한 살인범이 이 영화를 보고는 경찰에 자수했다고 해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그러나 좋은 쪽의 화제 이상으로 이 영화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 미국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감동적인 명작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게 한 장본인으로 유대인을 조명함으로써 반(反) 유대정서를 부추긴다’고 반발하고 있다. 뉴욕타임스와 USA투데이 등도 ‘유혈이 낭자한 난도질 영화’라고 혹평했다. 이 영화를 관람하던 한 유대인 여성은 심장마비로 숨지기도 했다.

이에 반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영화를 관람한 후 “강렬하고 감동적인 명작”이라고 찬사를 보냈으며 한국의 김수환 추기경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영화”라고 말했다.

그런데 일반 관객들의 주목을 끈 것은 ‘반유대주의’ 논쟁보다도 작품 속에서 생생하다 못해 처절하게까지 그려진 예수(짐 카비젤)의 수난과 인간적인 면모였다. 영화는 예수의 살점 하나, 핏줄 하나 놓치지 않는 극사실주의를 차용했기에 예수는 신(神)보다 인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재현됐다.

이처럼 예수는 영화를 통해서도 계속 부활하면서 점점 인간의 형상을 갖기에 이르렀다는 평가다. ‘신’에서 ‘인간’으로, ‘성인(聖人)’에서 고난받고 고뇌하는 ‘성인(成人)’으로의 변천과정을 겪어온 것이다.

예수가 등장하는 초창기 영화 속에서는 인간성보다는 신(神)성이 강조됐다. 세실 B 드밀 감독의 흑백무성영화 ‘왕중왕’(1927년작)에서 예수(헨리 워너)는 전형적인 성인(聖人)의 모습으로 등장해 4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성경 구절을 재해석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예수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머리 주위에 둥근 모양의 후광도 비춘다. 예수는 늘 광채에 휩싸여 있거나 스스로 빛을 발한다. 이는 신성을 강조하는 전통적 예수의 모습이다. 또한 베드로는 긍정적으로, 유다는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등 선악대비가 뚜렷하다.


▲ 나사렛 예수(1977), 예수의 마지막 유혹(1988), 가든 오브 에덴(1999),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 (왼쪽부터)

1961년 니콜라스 레이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된 ‘왕중왕’은 1920년대 작품과 유사한 줄거리 구성과 해석을 보여준다. 예수의 광채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경외의 대상으로 묘사돼 전통적인 예수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오슨 웰스가 내레이션을 맡고 제프리 헌터가 예수로 출연했다.

1890년 소설을 원작으로 1926년 제작한 무성영화를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리메이크한 작품, 찰턴 헤스턴 주연의 ‘벤허’(1959년작)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서 예수는 유대민족과 로마의 갈등과 원한을 초월한 사랑과 용서의 근원으로 형상화된다. 예수의 모습은 대사없이 뒷모습이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모습으로만 등장한다. 철저히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인간과는 다른 신성한 존재라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즉 벤허의 예수상은 ‘왕중왕’의 예수상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다.

노먼 주이슨 감독의 뮤지컬 영화인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1973년작)에서부터 예수의 인간적인 면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팀 라이스의 1971년작 록 오페라를 영화화한 작품. 이 영화를 통해 화려한 화면과 음악은 물론, 이전 영화들에 비해 확연하게 달라진 예수상을 관람객들은 목격했다. 예수(테드 넬리)를 배신하는 악역 유다를 새로운 인물로 그리며 예수의 두려움, 분노 등 인간적인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이 같은 예수의 인간적인 면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예수의 마지막 유혹’(1988년작)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이 작품 속에서 예수(윌렘 데포)는 악마의 유혹, 로마인들을 위해 십자가를 만들어준 것에 대한 죄책감, 세상에 대한 미련, 신으로부터의 끊임없는 부름으로 괴로워한다. 결국 나사렛의 목수 예수는 신이 자신에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하지만 그의 사명이 거의 이뤄질 때쯤 그는 보통 남성으로서의 커다란 유혹에 직면한다.

사탄이 변신한 소녀 수호천사가 “이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복종을 충분히 보여줬으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아도 된다”고 유혹한다. 고통에 몸무림치던 예수는 십자가를 내려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한다. 이어 인간 예수는 자신의 상처를 닦아주던 아내와 육체적 관계를 갖는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예수는 그것이 악마의 유혹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스인 조르바’ 등으로 유명한 그리스 출신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원작 소설을 영화한 이 작품은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는다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뜨거운 논란을 낳았다. 예수가 자신의 신성을 확신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인간적인 고뇌를 하는 것으로 인해 기독교계의 반발을 빚은 것이다. 한국에는 1998년 수입돼 개신교계의 거센 반발로 등급심의가 보류됐다가 2002년 1월 뒤늦게 개봉됐다.

이 밖에도 ‘위대한 생애’(1965년작)는 예수(막스 폰 시도)의 생애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자이언트’ ‘젊은이의 양지’의 조지 스티븐스 감독이 연출했고 찰턴 헤스턴, 시드니 포이티어 등이 출연했다. ‘나사렛 예수’(1977년작)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프랑코 제피렐리가 메가폰을 잡았다. 예수 역의 로버트 파웰과 성모 마리아 역의 올리비아 핫세가 최고의 캐스팅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예수가 등장하는 작품으로는 이외에도 ‘가든 오브 에덴’ ‘마태복음’ ‘나사렛 예수’ 등이 있다. 알렉산드로 달라트리 감독의 ‘가든 오브 에덴’(1999년작)도 논란의 대상이 된 바 있다. 4복음서에 등장하지 않는 예수의 12~30세 시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의 ‘마태복음’(1962년작)은 복음을 충실히 담아내면서도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민중을 부각시켰다. 파졸리니 감독의 유물론적 관점으로 이 영화는 예수를 영혼의 구원자이자 막시스트로 묘사하기도 했다.

(서일호 주간조선 기자 ihseo@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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