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 - 서양과 조선의 만남
박천홍 지음 / 현실문화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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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역사 쳐놓고도 그 분야가 세분회 돼서 문화사나 정치사 또는 미시사 등등으로 나뉘곤 한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외교사적 관점에서 접근한 책이다. 그것도 16세기 조선의 외교사. 또한 특이할 사랑은 조선의 인접 국가가 아닌 서양 관계사다.

사실 저자가 초두에도 썼듯이 조선은 중국의 어깨에 숨어 남의 나라와 교류하기를 꺼려했다. 그런 조선이 서양과 교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새삼 놀랍기도 하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서양은 탐험과 정복의 역사고 그런 기질이 우리 조선까지 그 손을 뻗히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어찌보면 긴 시간 문제였을 것이다. 근대적 동양은 서양의 침략을 받고 패배하고 착취되었을 때 비로소 근대에 들어섰다(17p)고 전하고 있다. 그러한 저자의 진술이 좀 서글프긴 하지만 그건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라는 게 서양의 그것과 달라서 능동의 역사는 되지 못하고 수동성의 역사가 아닌가?  

하지만 서양이 그렇게 호전적이고 정복적 기질만을 가지고 동양의 근대를 깨웠을까에 다소의 의문은 남는다. 적어도 우리나라가 서양과 교류하게 된 것은 기독교 전래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고 볼 때 그러면서 문물도 함께 전해졌다. 그런데 침략 받고 착취 당하면서 깨었다고...? 물론 내가 생각하는 시선으로만 서양 외교사를 보는 것도 너무 단선적이긴 할 것이다.

우리가 처음에 서양인을 봤을 때 기괴한 느낌이 들었던 것처럼 그들도 우리나라 사람을 바라 볼 때 같은 심정이었음을 이 책은 누차 반복하고 있다.(그래서 난 좀 이 책이 지루했다.)어쨌거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건 꽤 솔직하고 가식이 없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오늘 날을 보라. 누가 서양을 그렇게 표현하겠는가? 매일이든 또는 어쩌다가든 길거리를 나서면 우린 한 사람 이상의 서양인을 만나며 우리나라의 외국과의 교류는 너무 중요해졌다. 그러니 그 시대에 그런 표현은 솔직한 표현인 동시에 그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적인 표현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오늘 날이었으면 좀 더 복잡하고 더 많은 해석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

사실 난 이 책이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았다. 외교사 쳐놓고도 정치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전에 <스웨던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는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말이다. 물론 그 책은 이 책처럼 학술 서적은 아니다. 개인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시선으로 우리나라를 보는 것과 외국 특히 서양인의 시작으로 우리나라를 바라 보는 것이 이렇게 다르구나 해서 흥미로웠다. 그래도 그 책을 굳이 분류하자면 민간 외교사나 문화 외교사의 범주에 집어 넣어도 되지 않을까? 

그래도 이 책은 외교사적 관점에서 조선을 조망했다는 점에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이 책에 쏟은 노고도 충분히 짐작할 수도 있고. 이쪽에 관심있는 분은 일독해도 좋을 것 같다. 책이 두꺼운 게 좀 흠이라면 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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