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의 와인 예찬 - 내 인생의 와인들
심산 지음, 이은 그림 / 바다출판사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저자 심산은 나의 사부님이시다. 언젠가 사부님의 홈피를 방문했다가 놀라운 발견을 했다. [와인셀러]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 놓으시고 모 영화잡지에 연재한 와인에 대한 글을 올려 놓으시는 거다. 그리고 그 분량이 제법된다. 

문인들 중 주당들이 많고 사부님 역시 빠지지 않는 주당이시라는 걸 알고 는 있었지만, 13년 전 짧은 기간동안 그분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사부님은 늘 맥주만 드셨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절 오전 시간을 이용해서 일주일에 한번 사부님을 만나고, 낮시간에 점심겸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술이 맥주 밖엔 없었으리라. 그러던 사부님이 어느 날 나를 포함한 몇몇의 동기 문하생 앞에서 데낄라 음주법을 시연해 보이셨다. 산이 좋아 당신의 존함 조차도 산으로 명명하셨고,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혁명가 체 게바라를 좋아하시는 사부님에게 데낄라는 또 얼마나 잘 어울리는 술이었을까? 손등에 뿌려진 하얀소금을 혀에 살짝 데시고 데낄라를 원샷하시곤 레몬 한쪽 쭈욱 짜서 베어 무시는 그 모습에서 묘한 야성미가 느껴졌다. 그런 사부님이 와인이라니...?

주당들에게도 자기 좋아하는 술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술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는 나지만 데낄라를 마시던 사부님을 알기에 와인은 좀 의외였다. 이를테면, 데낄라는 남성적인데 비해 와인은 섬세한 여성을 닮은 술이 아닐까? 그렇다. 나의 사부님은 그렇게 남성적이셨다. 그러신 분이 작심하시고 와인을 공부하시고 이젠 아예 와인을 강의하시며, 와인을 예찬하시고 나오신다. 도대체 와인이 뭐길래 이토록 사부님을 사로잡았던 것일까?

최근 몇년 사이 와인 붐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꾸준히 늘어 날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난 와인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고 앞으로도 관심을 갖지 않을 확률이 농후해 보였다. 그런데 나의 사부님이 이렇게 와인과 사랑에 빠지셨으니 웬지 모르게 관심이 갔다. 아마도 생판 모르는 사람이나 나의 가족중 누가 와인과 사랑에 빠졌다고 해도 난 별 관심이 없었을 게다. 그러나 사부님께서 사랑에 빠지셨다니 괜시리 여인네 질투심일까? 적어도 와인의 무엇이 그토록 사부님을 사로잡는 걸까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책의 특징은 여느 와인책과 달리 스토리텔링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와인에 대하여 직설화법으로 풀지 않고 와인에 사람의 이야기를 접목시켜 설명하고 있다. 예를들면 이 책의 첫머리에 나오는 와인 중 '시라'라고 하는 포도주가 있다. 이것은 원래 프랑스의 '론'이라고 하는 지방이 원산지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그냥 설명하기 보다 책속에 화자가 자신의 연애 경험을 바탕으로 '이 여인을 시라라고 하자...' 하며 자신이 만난 여인을 빗대어 포도주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같은 여성이라고 해도 천차만별이다. 어떤 여성은 덕스러운 반면, 어떤 여성은 섹시하고, 어떤 여성은 고고한 반면 어떤 여성은 야성적이고, 어떤 여성은 변덕스러울 수 있다. 그것을 와인의 품종과 맛에 비유 했으니 독특한 발상이고 기발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여성과 포도주를 한데 엮었으니 내가 와인의 무엇이 사부님을 사로잡았을까 관심을 가질 밖에. 그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런 글들이 사부님의 홈피에 올라 가기 시작하면서 화자는 분명 사부님일테니 과연 그 연애에 대한 추억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가 허구냐를 놓고 갑을논박 댓글 전쟁(?)이 벌어졌다. 물론 사부님은 끝까지 이것은 어딨까지나 이미지일 뿐이라고  일갈하신다. 그렇다면 또 그렇게 믿는 수 밖에.ㅎ 그만큼 글은 관능적이고 매혹적으로 첫 3분의 1정도를 장식한다.

하지만 말했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능과 매혹으로만 일관하지는 않는다. 뒤로 갈수록 남자들만이 느낄 수 있을 법한 진한 우정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고, 그 밖에 저자가 만난 사람등 주변의 이야기도 끼어들어 책의 재미를 더한다. 그러나 어찌보면 이 책을 통해 와인을 얘기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사람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 약간은 헷갈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 같이 와인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벽안의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와인이 이러 이러한게 있었구나 아는 것만으로도 유익할 것이다.

사실 나는 이 책을 개기로 얼마 전에 열렸던 사부님의 강연회에 다녀왔다(그때 나의 사부님은 우리가 와인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상식을 10가지 키워드로 강연하셨다.). 거기서 알았던 건 와인은 살아 있는 술이며 4천 가지가 넘고, 지금도 계속 새로운 와인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와인이 살아있는 술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와인은 사람의 생의 단계와 함께 할 수 있다. 즉 예를들면 내가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났다면 그 아기가 태어난 해에 만들어진 포도주를 12병들이 박스로 사다놓고, 그 아기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 여자아이인 경우 첫월경을 할 때, 중학교 졸업, 고등학교 졸업, 대학교 졸업, 취직  때, 결혼할 때 등 해서 기념할만할 때 딴다는 것이다. 이만하면 와인이 그 사람의 생애와 가족의 돈독함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깨달았다. 왜 나의 사부님이 그토록 책의 첫머리 3분의 1을 할애해 가면서 여성을 빗대어 와인을 설명했는지를. 그것은 바로 와인이 살아있는 술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것은 섬세하게 다루어 주지 않으면 안된다. 여성은 섬세하고 여성은 그렇게 섬세하게 배려해 주는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 와인도 그런 술이 아닐까?

이 책에 나오지 않는(그것은 그분의 싸이트에서만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즉 '전직애인연합'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저자가 여자만 보면 사귀자고 했고, 실제로 사귀었다 이러 저러한 이유에서 헤어진 여자들끼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 친구가 되어 속칭 연합을 만들고 자신을 씹고 있더라는 것이다. 나는 그 얘기를 읽으면서 킥킥대며 정말 많이 웃었다. 여자만 만나면 사귀자고 했을 사부님이 귀여웠고(이런 말해도 되나...?), 전직애인 연합이 조직되었을 정도니 자신이 한 일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어느새 이 부분에서 신화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와인도 그러지 않았을까? 처음엔 그저 치료를 목적으로 했던 술이 지금은 세계적인 명품의 반열에 올랐고, 호사가의 멋과 풍유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켰을뿐만 아니라 이젠 일반인의 관심을 독차지 하다시피했다. 와인에 관심을 가질 정도면 우리나라도 꽤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와인과 국민소득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책을 읽으면서 나름 아쉬운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와인 못지 않게 우리나라 전통주도 김치만큼이나 세계적인 주목을 가질만도 한데 왜 전통주는 아직도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조상 대대로 마셨던 막걸리는 살아 숨쉬는 술이 아니라 죽은 술이라고 단언했을 때 아쉬움이 컸다.

이 책의 장점은 스토리텔링 기법을 가지고 썼다는 것외에도 저자의 문체의 적확함이 이 책을 더 빛나게 한다. 솔직히 난 이점 때문에 읽으면서도 가슴을 쓸어내렸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으니까. 이 책은 글쓰기를 공부하는 사람에겐 참고가 될만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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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0 22: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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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2 10: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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