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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쓰다
매거진 t 편집부 엮음 / 씨네21북스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언젠가 읽으려고 찜을 했었나 보다. 물론 찜을 했다고 꼭 읽게 되진 않는다. 그래도 인연이 아주 없지 않은지 절판되고 중고샵에 아주 싼 값으로 나와 있으니 읽어 볼 마음이 동했다. (어떤 물건은 지나치게 싸면 싸구려란 느낌 때문에 오히려 안 사게 되는데 책은 그렇지가 않다. 싸면 쌀수록 환호하게 된다.) 책은 세 명의 드라마 작가와 한 명의 드라마 PD의 작품론과 인터뷰를 실었다. 나는 늘 작가를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건 방송 드라마 작가다. 내가 관심 있어하는 쪽은 소설가들인데 말이다. 그래서 오래도록 나의 선택을 받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방송은 그 구조상 금방 잊히지 않는가.
보라. 이 책은 2006년에 초판이 나왔고 여기 다룬 사람들은 당시엔 나름 활발한 활동을 펼쳤겠지만 지금은 뭘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나마 나의 최애 작가인 노희경 작가는 지난 2018년 이후 지금까지 이렇다 할 작품을 내지 못하고 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과연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역시 초록은 동색이라고 이런 책도 흥미롭긴 하다. 재밌는 건 황인뢰 PD가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한다. TV 드라마 작가는 여자 작가들이 많은데 처음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작가가 담배를 피우면 글을 잘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다. 술을 잘하는지 물어봐서 잘한다고 하면 속으로 '좋아!' 한단다. 그리고 이야기하다 이혼 경력도 있다고 하면 '좋아, 좋아!' 속으로 탄성을 지른단다. 얼핏 들으면 아니 이 사람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다음 얘기가 좀 다르다. 감독들은 다양한 삶을 많이 경험한 작가들을 선호하기 때문이란다. 방송이란 게 시간 싸움인데 작가가 자신의 삶으로부터 바탕이 되는 저력 같은 게 있지 않으면 버티질 못하기 때문이라고. 권투 할 때 맷집 좋은 선수가 이길 확률이 높은 것처럼 작가도 그런 맷집 같은 저력이 있는 작가를 감독들이 좋아한다는 것이다.
꼭 드라마 작가가 아니어도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것 같다. 그렇다고 진짜 작가가 되기도 전에 술 담배를 하고 이혼부터 하란 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 작가에 대한 묘한 이미지가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지적이긴 한데, 머리는 산발을 하고 까칠하고 신경질적이며 직설화법을 쓰는 뭐 이미지가 연상되지 않는가. 이건 또 드라마의 영향이기도 할 것이다. 가끔 드라마에 등장인물로 작가가 나오면 그런 캐릭터로 쓴다. 그건 어쩌면 근성 있는 작가처럼 보이기 위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너무 사람들에게 휘둘리거나 그 반대로 너무 자신을 꽁꽁 싸매는 작가는 현장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이게 어디 드라마 작가에만 요구되는 말일까. 자신이 어느 현장에서 무슨 일을 하든 근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만만히 보이지 않으며 무엇을 하든 두려움 없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이것을 요즘에야 깨닫는다. 나이 들어.ㅠ
근데 역시 난 드라마 작가는 이번 생뿐만 아니라 다음 생에도 못할 것 같다. 시간 싸움을 잘할 것 같지도 않고, 술 담배는 물론이고 결혼을 안 하면 모를까 했다면 이혼 같은 건 가급적 안 할 생각이니까. 물론 드라마 작가가 엄청 부럽긴 하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까 어떤 드라마 보면 대단하다 싶다. 하지만 나를 깎아 먹으면서까지 드라마 작가를 할 생각은 없다. 내가 오히려 본받고 싶은 작가는 하루키 같은 작가다. 그는 황인뢰 감독이 원하는 작가와는 정반대다. 얼마나 바르고 흐트러짐이 없는지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을 것만 같다. 누가 보면 숨 막힌다고 하겠지. 그래서 그는 시나리오 작가는 못할 것 같다고 공언했었다. (시나리오 작가나 드라마 작가나) 무엇보다 현장의 사람들과 소통을 잘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는가. 요는 같은 작가여도 자신에게 맞는 일이 있다는 거고 그 일을 잘하면 되는 것이다. 근성 있게. 항상 바르고 흐트러짐이 없다고 근성도 없는 건 아닐 테니.
그런데 작가는 만만한 직업인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게으르면 한 없이 게으를 수도 있는 직업이다. 노희경 작가가 책에서 이런 말을 한다. 작가 작가 하면서 단 5분도 쓰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고. 사실 작가 되는 거 어렵지 않다. 대신 잘 쓰는 작가가 되려면 매일 쓰는 작가가 되라고 한다. 매일 단 한 줄의 글이라도 쓰라고. 거 보라. 하루키 같은 작가는 문학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방송 드라마계에도 있고 시나리오계에도 있다. 작가라면 어쨌든 쓰는 거. 어쨌든 근성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노희경 작가는 한마디를 더 한다. 대사를 쓰기 위해 대본을 쓰지 말라고. 대사를 잘 쓰면 좋은 극작가가 되는 거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고. 지당하신 말씀이다. (이미 얘기한 적도 있지만) 어떤 작가는 대사 과잉이고, 어떤 작가는 시적인 대사를 뽑아내려고 병적으로 매달리는 게 보인다. 그것을 띄워주는 티저도 있고. 드라마는 삶이다. 등장인물의 구체적인 삶이 보이지 않고 대사 하나 잘 쓰면 드라마 작가가 되는 거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그러려면 차라리 시를 쓰는 편이 낫다.
솔직히 난 처음에 이 책의 구성이나 디자인이 별로였다. 글자는 별로 없고 듬성듬성하다. 사진도 많고. 근데 읽다 보면 나름 곱씹어 볼만한 내용이 있다. 다소 잡지 같은 느낌이다. 시대를 타는 느낌이고. 예를 들면 황인뢰 PD가 요즘 핫한 배우 주지훈이 그의 데뷔작 <궁>에 나온 얘기를 하는데 역시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웃음이 나왔다. 다른 뜻은 없고 주지훈은 내가 요즘 눈여겨보는 배우라서. 또한 <안녕, 프란체스카>란 시트콤은 나도 몇 편 본 기억이 있고 작가 역시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작가는 요즘 뭐하고 살까 했더니 2011년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인터뷰했을 때만 해도 아직 젊었고 내내 뭔가 모를 불만과 외로움이 베어 있었는데 말이다. 그런 것처럼 이 책은 마치 오래된 누군가의 앨범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방송계의 관음증을 (어느 정도) 만족시켜 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렀겠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