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쩐의 전쟁’ 사채 이자보다 높은 인기
  • 있다… 조폭보다 무서운 사채업자
    없다… 밥보다 사랑찾는 비현실성

    대사까지 유행… 돈에 대한 이중심리 파헤쳐
  • 최승현 기자 vaidale@chosun.com 
    • 돈, 누군가에게는 편하고 아름다우며 고귀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을 벼랑 끝까지 내모는 싸늘하고 무서운 존재다. SBS ‘쩐의 전쟁’은 한국 드라마가 외면해왔던 돈의 공포스러운 이면(裏面)을 샅샅이 드러내 보이며 방송 5회만에 30%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하는 폭발적 호응을 얻고 있다.
    • ▲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쩐의 전쟁’돌풍을 이끌고 있는 주인공 금나라 역 박신양.
    • “한 사람의 부자가 있기 위해서는 500명의 가난뱅이가 있어야 한다”는 고전 경제학의 창시자 애덤 스미스의 이 말은 ‘쩐의 전쟁’ 주제 의식을 간명하게 집약한다. 이향희 작가는 이 말을 곧 사채업자 독고철(신구)의 입을 통해 실어 보낼 예정. 베일에 가려진 사채업계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 때문에 화제가 됐지만, 이 드라마는 사실, 돈에 관한 한국 드라마의 뻔하디 뻔한 ‘클리셰(상투성)’를 조각조각 깨부수며 대중의 호기심과 환호를 얻고 있다. 이 드라마의 원작은 박인권씨의 동명(同名)만화.

      주인공 금나라(박신양)가 사채업자로 성공하는 과정을 기둥 줄거리로 삼고 있는 드라마는 극 초반 돈 만원이 없어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하고 생사의 기로에 서는 서민들의 처절한 일상을 ‘볼거리’로 내세웠다. 사채를 끌어다 쓰며 양말 공장을 하다 망해 신용카드로 손목을 그어 자살한 금나라의 아버지, 노숙자 신세가 돼 쓰레기통을 뒤지다 쥐약 묻은 빵을 먹고 죽다 살아난 금나라, 아버지의 빚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바람둥이 이혼남 부동산 재벌과 결혼을 결심하는 서주희…. 돈 때문에 몸도 마음도 망가지는 주인공들 모습은 한국 드라마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 ▲ ▲‘쩐의 전쟁’또 다른 인기 주역… 사채에 시달리는 은행원 서주희 역의 박진희.
    • ‘정상적’인 드라마 속 주인공이란 무릇, 아버지가 물려주신 기업의 소유권을 빼앗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할지언정 빚에 쫓겨 끼니를 걱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설사 집안 형편이 어려워도 당당하게 “난 밥보다 사랑”이라 외치며 야반도주를 해야 하는 법.

      그런데 ‘쩐의 전쟁’은 냉엄한 현실을 잊게 하는 판타지의 길을 거부하고,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더 지독하게 턱밑에 들이대 역설적 깨달음을 주고 있는 것이다. 3년 전 역시 박신양이 주연을 맡아 시청률 50%를 넘어섰던 ‘파리의 연인’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셈. 김영섭 책임 프로듀서는 “IMF 사태 이후 빈부 격차가 심해지면서 돈 문제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은데 그들의 공감이 뜨거운 것 같다”고 했다. 돈과 돈벌이에 대한 교훈적 대사도 지나칠 수 없다. 주로 인간적인 사채업자 독고 철의 입에서 쏟아지는 돈에 관한 철학이 담긴 ‘명언’은 방송 직후, 인터넷을 떠돌며 대중들 사이에 다시 소비된다. 이향희 작가는 “돈에 대한 사람들의 묘한 이중적 심리를 파악해야 좋은 대본이 나온다”고 말했다. 이 작가는 드라마를 위해 10여명의 사채업자를 만났으며, 사채업체도 취재했다.

      하지만 금나라의 성공 스토리가 빠른 속도로 전개되지 않았다면 드라마는 금세 힘을 잃고 지지부진하게 스러졌을 것이다. 여전히 구차하지만 ‘지옥’ 같은 현실을 딛고 일어나 달려가는 금나라의 카멜레온 같은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현실적인 ‘대리만족’을 주고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드라마 속 사채업계 묘사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조성목 금융감독원 서민금융지원팀장은 “사채의 무서운 측면을 현장감 있게 그려내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높여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면서도 “드라마 속 ‘독고철’처럼 저리(低利)로 어려운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사채업자가 현실에도 있기는 하지만, 사채업자가 너무 미화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 ■미소와 광기 번갈아 풀어놓는 박신양 인터뷰 

      ‘쩐의 전쟁’에서 길바닥을 뒹굴며 사나운 기를 발산하는 박신양. 하지만 그도 새벽 1시가 되니,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요즘 촬영하는 기분 어떤가”라는 질문에 “한참 촬영을 하다 심각한 질문을 받으니 몸이 움츠러든다. 3일 밤낮을 1~2시간 새우잠으로 버티며 촬영하고 있다”고 답하는 음성이 낮게 깔린다. “피곤해서 목소리가 그런가?” 물었다. “아니다. 바로 촬영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긴장해서 그렇다.” 어깨를 짓누르는 드라마의 무게 때문일까? 무척 예민하다.

      SBS 수목 드라마 ‘쩐의 전쟁’ 초반 돌풍은 브라운관을 헤집으며 무섭게 몰아치는 박신양의 힘이 절반. 돈에 한이 맺혀 사채업자의 길에 들어선 그는 순수한 미소와 악마적 광기를 번갈아 얼굴에 풀어놓으며 응축된 내면을 폭발시킨다.

      “돈이오? 하하 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경제 관념이 희박해요. 살아가는 동안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돌진하는 것은 멋지지만, 돈만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추악하지 않습니까?”

      박신양은 ‘쩐의 전쟁’이 “적중한 기획이었다”고 했다. “그동안 드라마에서 다루지 않았지만 필요하며 공감이 가는 이야기잖아요. 생소한 소재라 불안하기도 했지만 결국 시청자들이 감상하기에 모자라지 않는 작품이 된 것 같습니다. 모험이 성공한 거죠.” 그는 “이런 파격적 소재가 아니었다면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파격적 소재가 불안해서 끌렸다”

      박신양은 극 초반부 지저분한 노숙자 연기로 눈길을 모았다. “검댕 투성이 얼굴에 쓰레기통 뒤지는 연기가 어렵지 않았냐?”고 묻자 “워낙 나락으로 떨어지는 장면이라 어느 정도로 해야 시청자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을지 판단하는 게 쉽지 않았다”며 “매 신, 매 순간 제작진과 협의하며 카메라 각도, 연기의 강도 등을 결정했다”고 했다. “연기 자체는 재밌었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게 연기의 매력이잖아요.”

      박신양의 전작(前作) 드라마인 ‘파리의 연인’은 시청률 50%를 넘겼다. ‘쩐의 전쟁’ 또한 초반 기세로 보면 ‘파리의 연인’ 못지않다. “‘박신양 출연=대박 드라마’ 공식이 생길 것 같다”고 하자 쑥스러운 듯 웃으며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했다.

      “이런 건 있는 것 같아요. 정말 지금 사람들이 원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작품을 고르거든요. 나름 나쁘지 않은 판단을 하고 있는 거죠.”

      박신양 또한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애 먹었던 시절이 있었다. 러시아 쉐프킨 연극대학교 유학 시절. 그는 “당시 러시아에는 유학생이 아르바이트로 할 만한 일을 찾기가 힘들었다”며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돈으로 살다 보니 쪼들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그러더니 덧붙였다. “하지만 살면서 누구나 한번씩은 겪게 되는 경험 아닌가요?”


    • 제작진이 꼽은 ‘쩐의 전쟁’ 명대사…

      남자는 상처를 남기지만 돈은 이자를 남긴다.

      ■남자는 상처를 남기지만 돈은 이자를 남긴다.(서주희, 2회)

      ■남의 돈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있다.(독고철, 3회)

      ■대한민국은 돈이면 다 됩니다. 낙타가 아니라 코끼리, 항공모함도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요.(금나라, 4회)

      ■싸구려 사채업자는 서류에 연연해 하지만 유능한 사채업자는 오직 인간심사만 한다. 서류는 조작될 수 있어도 인간은 조작될 수 없거든.(독고철, 2회)

      ■법보다 주먹, 주먹보다 쩐이 앞서는 세상.(마동포,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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