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 한자어사전 -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한자어 속뜻 사전 ㅣ 잘난 척 인문학
이재운 외 엮음 / 노마드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사전을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금이야 온라인 검색창에 자신이 알고자 하는 단어를 입력하면 휘리릭 알아서 찾아준다. 아날로그 시대 땐 사전 찾는 법을 따로 배워야 했다. 또 두껍기는 얼마나 두껍던지. 학창 시절엔 뭐든지 필요에 의해서 배우는 곳이라 국어사전보다는 영어 사전을 더 많이 보게 된다. 좀 부끄러운 얘기지만 지금은 보지도 않는 중학교 때 산 벽돌 같은 영어 사전을 아직도 가지고 있지만, 변변한 국어사전은 그때나 지금이나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온라인에서 사전을 수시로 찾아본다.
글은 쓰면 쓸수록 단어에 대한 집착이 편집증처럼 강해진다. 이미 아는 단어도 다시 찾아보게 된다. 내가 혹시 잘못 알거나 대충 알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워지는 것이다. 또한 이 문장에 이 단어를 써도 되나 확인 차원에서 알아보게 된다. 얼마나 좋은가. 책으로 된 사전이었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을 인터넷이 가능하니 손쉽게 할 수 있다. 대신 단점이 있기는 하다. 꼭 내가 알고자 하는 단어만 알 수 있지 그 외의 것을 에둘러 알아보지는 않게 된다. 책으로 된 사전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만 그래도 항목별로 나열되어 있어 에누리로 몇 개의 단어를 더 읽어 볼 수도 있다. 작가가 되려는 사람은 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는 제의를 거치기도 한다. 뭐 그게 꼭 아니더라도 어휘가 풍부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멋있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사전은 누가 만드는 걸까. 읽는 것 자체도 지난한데 그걸 편찬하는 사람은 얼마나 지난한 작업을 할지 짐작도 할 수가 없다. 이 책을 읽으려고 하니 언젠가 보았던 <행복한 사전>이란 일본 영화가 생각났다. 주인공으로 마츠다 류헤이의 캐스팅은 적절하다 못해 정말 훌륭하기까지 했다. 그는 정말 치밀하고 꼼꼼한 서생처럼 생겼다. 과연 이런 일을 하기에 딱 어울리는 이미지다. 아니면 시계를 만들거나.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못할 것만 같지만 뭔가 남이 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점에선 새삼 존경스러움이 느껴진다. 이 책의 엮은이도 그렇다. 엮는 작업과 사전 편찬의 수고로움이 무슨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읽으면서 새삼 존경스러움이 느껴졌다. 그걸 또 이번에 처음 펴낸 것도 아니다. 비슷한 작업을 전에도 했고 이것만도 증보판이다. 그가 어떻게 작업을 했는지를 머리말에 밝혀놓고 있는데 과연 이럴 수 있나 싶기도 하다. 이것 말고도 소설도 썼다.
"...... 나는 우리 어휘를 써서 소설을 써온 작가로서 누구보다 우리말에 가까이 가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1994년부터 우리말 사전 시리즈를 편찬해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 한자어 사전>을 2005년에야 초판이 나올 만큼 시간이 오래 걸렸다. 거의 10년간 한자어를 연구하고 수집하고 검증하여 겨우 초판을 만들어 세상에 선보였다.
3년 만에 2판을 낼 때는 더 집중하여 관련 어휘를 1000개로 늘렸고, 이번 3판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우리 한자어 사전>에서는 생활 어휘를 더 추가하여 2000여 개 어휘로 확 늘렸다. "
과연 이것을 언제 다했을까 싶다. 특별히 자신이 한자어 공부를 한 연유를 밝히고 있는데, 어렸을 때 서당 다니던 형을 따라 천자문과 통감을 웅얼거리고, 고등학교 때 한문 서적을 많이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한문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더구나 후배가 8년간 수천만 원을 들여 사들인 한문 고서적 1만여 권을 그의 서재로 보내 마음껏 읽게 해 준 이야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대학원 시절 스승인 서정주 시인에게 여쭸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스승님 같이 시를 잘 쓸 수 있냐고, 그러자 미당은 시를 잘 쓰려면 이런 거 저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일단 한문 공부부터 하라고 조언하더란다. 그래야 우리글의 깊은 맛을 낼 수 있다고. 우리말 그릇이 본디 한자어고, 한자어는 한문으로 길들여진 말이니 그 그릇이 튼튼해야 서양 공부든 동양 공부든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이쯤 되면 한자어는 그의 운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이 운명에 확실한 쐐기를 밖은 건, 우리 국어사전에 한자어가 70%란 통계가 있더란다. 하지만 그 70%의 한자어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대부분 일본 한자어라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원래 쓰지 않았던 것을 일제강점기의 친일파와 일본 유학생들이 쓰던 그들만의 한자어라는 것이다. 그다음 말은 더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운명이 사명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수록된 단어는 본뜻과 자구 해석, 바뀐 뜻, 보기글로 세분화되어 있는데 비교적 간단명료하지만 어떤 건 그 단어가 유래된 배경을 설명하기도 한다. 정말 읽어 볼만하다. 그건 또 거의 대부분 고대 중국에서 유래된 것들이 많다. 그렇다면 작가가 지적한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 국어사전을 쥐고 흔들만한 단어는 뭐가 있었을까. 한 예로 방송(放送)이란 단어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어다. 이것의 본뜻은 죄수를 감옥이나 유배에서 풀어주다의 뜻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방송국이 생기기 전인 1920년대까지 방송은 석방(釋放)과 같은 뜻이었다고 한다. 그것을 영을 내려 시행한다는 의미로 '방송을 명한다'라고 했다. 이것의 바뀐 뜻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장교가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었는데 후에 이것이 영어의 '브로드캐스팅'을 번역한 말로 채택되어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용어가 지금의 전파를 송출해서 내보내는 통신용어가 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7년 경성방송국이 개국되면서부터라고 한다. 아직도 설을 구정이라고 쓰는 사람이 있다. 종종 있다. 구정이야 말로 일제 강점기 때 썼던 말인데 지난 세월 이런 우리 국어에서 일제의 잔재를 걷어내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완전히 없앤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은가 보다.
읽다가 매춘(賣春)이란 단어가 생각보다 흥미롭다. 원래 춘이란 단어가 중국 당나라에서 쓰이던 말로 좋은 뜻이란 뜻이란다. 대개 술은 정월에 빚어 봄이 가기 전에 완성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의 자구 해석은 좋은 술을 사다인데 여자가 남자를 그리워하는 정을 춘이라고도 했단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매춘이란 단어다. 그렇다면 '위안(慰安)'이란 단어는 어떨까? 남의 종기를 불로 지져 치료해 주는 사람이란 뜻의 위와 편안하게 해 주다는 뜻의 안이 하나가 된 단어다. 이는 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일본군들이 성노예로서 위로하고 편안하게 해 준다는 뜻으로 썼다. 문득 이 매춘과 위안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듯하면서 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렇게 우리가 알듯 모를듯한 단어를 새롭게 또는 확실하게 안다는 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다. 가까이 두고 시간 날 때마다 또는 머리가 복잡할 때 조금씩 읽어 두면 좋을 것 같다. 또한 이 지난한 일을 한결같은 자세로 임했을 이재운 작가와 함께한 이들에게도 심심한 위로의 박수를 전하고 싶다. 여담이지만, 난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을 선호하는 편인데 종이책의 묵직함이 사전은 잘 안 찾아질 것 같다. 전자책으로 보는 것이 훨씬 활용도가 높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