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좋아하세요?
엄상준 지음 / 호밀밭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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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의 물성을 좋아한다. 내내 블로그나 카페에서 보던 글도 종이책으로 보면 그 느낌이나 질감이 다르다. 그건 아마도 내가 아날로그 세대여서 인지도 모르고 디지털이 아무리 발전해도 종이책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요즘엔 일반인들도 책을 내는 시대라 내내 인터넷에서 보아 온 글도 종이책으로 보면 또 달리 보이는 게 있다. 


이 책의 저자와는 한때 운이 좋아서 같은 사이트의 블로그를 사용(인터넷 서점 알라딘)하고 있어 한동안 글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땐 저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주로 음악에 관한 글이 많이 올라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쪽의 애호가는 아닐까 짐작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책으로 마주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책 표지가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운이 좋아 사인본까지 받았다. 난 그때서야 알았다. 그가 한 방송의 음악 프로그램 PD라는 걸. 그러자 그 시절 그가 블로그에 올렸던 글이 이해가 갔다. 음악과 책을 한 쳅터 안에 엮는 솜씨도 뛰어나지만 문장이 정말로 좋다. 각 글의 제목부터가 예사롭지가 않다. 세상에 무슨 짓을 하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음악은 늘 우리와 함께한다. 우리가 의식하든 안 하든.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저렇게 음악을 가까이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다. 어렸을 적 내가 음반을 가까이할 수 있었던 건 이사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당시 신상품이었던 스테레오 전축을 들여오면서부터 였다. 물론 전에도 전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래되기도 했고 고장이 나서 그 위에 다른 세간살이를 올려놓는 등 받침대 역할 밖엔 하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너무 어려 그런 물건에 관심도 없었다.


그때 아버지는 음악을 들으려고 전축을 산 것이 아니었다. 약간의 허세를 즐겨하셨던 아버지는 음악보다는 전시 효과를 위해 그걸 집안이 들이셨다. 덕분에 호사를 누리건 우리 4남매였다. 그때 언니는 막 사춘기에 접어들었고, 두 살 터울인 오빠도 발동이 걸리려고 폼 잡고 있는데다 난 또래보다 다소 조숙했다. 사춘기가 시작했다는 건 그 안에 문예부흥이 시작됐다는 말도 된다. 그동안 TV나 라디오에서 간헐적으로 듣고 알았던 것들이 허기로 느껴지면서 소유욕을 애써 숨기지 않는다. 언니는 엘비스 프레슬리나 닐 다이아몬드, 폴 모리아 악단 같은 팝 음악을 모으기 시작했고, 오빠는 락을 좋아했으며, 나는 고상하게도 클래식을 좋아했다. 내 동생은 아직 코찔찔이라 음반 보단 만화를 더 좋아했는데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나중에 음반에 대한 조예는 나를 훨씬 능가하긴 했다.              


내가 한때나마 클래식 음반을 좋아했던 건 부모님이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오직 나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하신 것에 기인한다. 단지 안타까운 건 내가 피아노를 배우기 전 먼저 클래식 음악을 자연스럽게 접했다면 중간에 그만두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한창 백건우와 정명훈이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을 땐데 부모님은 그들이 어떻게 피아노를 치는지 나에게 들려준 적이 없으면서 무조건 그들과 같은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라고만 하셨다. 그때 난 백건우나 정명훈보다 내 몸의 다섯 배쯤 되는 시커먼 피아노가 더 무서웠다. 그래도 그때 배웠던 몇몇 피아노곡은 아주 싫지만은 않았다.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내가 속한 반이 합주반이었다. 그때 우린 서울 지역의 초등학교와 합주 경연을 해야 했는데 몇 번의 예선을 거쳐 본선 최종 엔트리에 올라 마지막 경합을 벌여야 했다. 그때 우리의 출전곡은 요한 슈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이었다. 사실 난 처음엔 이 합주를 못할 뻔했다. 왜냐하면 피아노를 그만두고 얼마 있지 않아 오른쪽 팔다리가 마비가 와서 이제 악기를 연주한다는 건 내 생애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합주 구성 악기 중 멜로디혼 파트가 있었는데 그건 본래 한 손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그런 거라면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바로 그것이다. 음악을 알려면 먼저 그렇게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이후로 나는 음악을 듣다면 꼭 클래식만 들었고 음반도 꼭 클래식만 사 모았다. 아마도 초등학교 6학년 때 그 경험이 없었다면 더 나아가 피아노 수업 경험이 없었다면 클래식은 내 생애 없는지도 모른다. 또한 음악을 단순히 듣는 것과 그 곡을 직접 연주해 본다는 건  또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왜 부모들이 할 수만 있으면 자기 자녀들에게 음악을 시키려 하는지 알 것도 같다.     


하지만 클래식은 확실히 약간의 노력과 의도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분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물론 늘 클래식 음악만 흐르는 가정이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말이다. 이건 정말 노력하지 않으면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후로 줄곧 클래식만 들을 것 같던 내가 어느새 듣는 음악이 팝송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절 최동욱, 이종환, 김기덕, 김광한, 전영혁 등 전문 DJ 또는 팝 칼럼니스트가 라디오에 등장해 춘추전국 시대를 이루었다. 클래식은 영원하지만 대중음악은 그때가 아니면 안 된다. 책의 저자는 라디오는 복지라고 했는데 그 말에 동의한다. 매일 틀어주는데 듣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일이다.  


귀동냥이 무섭다고 괜찮은 음악은 제목과 가수 이름을 메모도 하고, 녹음테이프에 녹음도 했다. 아마 공부를 그렇게 했더라면 S대 아니야 하버드대도 갔을 것이다. 게다가 그 시절엔 각 다방마다 DJ 박스가 있어 음악 신청도 할 수가 있었는데, 친구와 함께 다방에 갔다 내가 신청한 음악 리스트를 DJ가 보고 예사롭지 않은 선곡이라며 한껏 띄워주는 바람에 우쭐한 적도 있다. 왜 그런 일은 학점 인정이 안 되는지 모르겠다.  


그런 내가 90년대 들어서면서 음악 듣기가 시들했다.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다. 하다못해 서태지와 아이들이 가요계를 발칵 뒤집어 놨는데도 난 그다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냥 그런 음악이 있나 보다 할 뿐이다. 더 이상 들을 게 없는 것처럼 모든 게 시큰둥이다. 하긴 아무리 좋은 것도 시간이 흐르면 권태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엄밀히 생각해 보면 열광만 안 했다 뿐이지 난 그때도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듣고 있었을 것이다. 아 맞다. 생각해 보니 난 그 시절 가스펠, 복음성가를 즐겨 들었다. 그건 물론 내가 기독교인이기도 하지만 송정미나 하덕규, 박종호 같은 90년대 기라성 같은 가스펠 가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들의 음악은 종교음악이라는 특정에 갇혀 있어서 그렇지 편곡이나 음악성은 웬만한 메이저 가수들 못지않은 기량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같은 음악을 들어준다면 난 언제나 가스펠이었다.     


그러다 음악을 다른 관점에서 듣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연극에서 음악은 어떤 곡이 어떻게 쓰일 수 있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음악을 좀 더 생산적으로 듣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그건 새로운 경험이고 지금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어떤 음악이 어떻게 쓰이나를 관찰하는 버릇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난 정말 약속처럼 클래식 음악으로 돌아와 있었다.


언젠가 문학수 기자가 클래식을 듣는 근육을 키워야 한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난 그 말에 동의한다. 그런데 인생을 두고 고행이라고도 하지만 가끔은 선물 같은 때가 있다. 그게 또 인생이다. 음악도 그런 것 아닐까. 아무리 음악을 좋아한다고 해도 모든 음악을 다 좋아할 수는 없다. 음악을 듣다 보면 문득 '얻어걸리는'게 있다. 그게 바로 선물 같은 순간일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음악에 대한 관심은 시작되고 자란다. 나를 보라. 초등학교 시절 내가 속했던 반이 합주반이 아니었다면 그때 내가 멜로디혼 파트를 자청하지 않았다면 요한 슈트라우스가 무슨 행진곡을 어떻게 작곡했는지 알지 못했거나 훨씬 나중에 알았을 것이다. 그건 정말 지금 생각해도 선물 같은 때라고 생각한다. (물론 합주 연습을 했던 당시는 정말 지난했다. 추억이 선물이었을 테지.)     


솔직히 어렸을 때 나의 음악 교육은 실패였다. 그건 나의 실패이기도 하지만 나의 부모의 실패이기도 하다. 물론 부모님은 내가 피아노를 배워서 훗날 뭐에라도 써먹길 바라셨을 것이다. 또한 기왕이면 원대가 꿈을 가져주길 바라셨을 것이고. 그건 또 여느 부모라면 다 갖는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그 보단 어떻게든 이 아이가 생을 즐길 줄 알고 누릴 줄 알고 조금이라도 풍요롭게 살아주길 바라서 음악을 가르치는 거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모든 것엔 목적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성취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누리면서 배우는 것과 목적 성취를 위해 배우는 건 그 시작부터가 다른 것인데 말이다. 책을 읽다 정말 공감하는 말이 있어서 밑줄을 쳤다.


어린 시절에는 사람들이 알만한 성과를 거두는 것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알 나이가 되었다. 어떤 삶은 그냥 포기하지 않고 잘 살아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희망이고 성공이다. 봄 그늘 아래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어여쁜가. (103p)  


과연 어여쁜 깨달음이고, 어여쁜 말이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기 위해 얼마만 한 인생을 되돌아왔을까. 음악을 왜 들어야 하냐는 바보 같은 질문은 하지 말자. 음악은 내가 태어나기 수천 년 전부터 있어왔고 불려 왔으며 들어왔다. 음악을 듣고 아는 건 각자의 선택이고 알아서 할 일이다. 음악을 알아서 내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이라면 알지 않을 이유가 없다.


책이 정말 좋다. 읽는 것만으로도 생각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저자의 책이 이제야 나왔다는 게 너무 늦은 행보는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 만큼 저자의 다음 책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표지 디자인도 마음에 들었는데 오탈자가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곧 2쇄가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그땐 바로 잡아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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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0-01-21 07: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때 어머니의 교육열에 떠밀려서 피아노 학원에 다녔어요. 그땐 피아노를 배우기 싫었어요. 그런데 계속 학원을 다니다보니까 피아노 연주를 좋아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IMF가 왔던 해에 학원을 그만뒀어요. 이제 막 피아노 연주하는 재미에 푹 빠졌는데 학원의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많이 울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너무 아쉬워요. 피아노 학원을 나오지 않고 계속 다녔으면 고급 수준의 피아노 교본에 있는 곡을 연주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을 거예요.

stella.K 2020-01-21 14:50   좋아요 0 | URL
아깝게 됐네. 하지만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성인이 되서 피아노나 바이올린 배우는 사람도 많더라구.
꼭 피아노가 아니더라도 뭐라도 배워두면 좋을 것 같아.
기타는 어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아님 아예 남이 잘 안하는 걸 개척하는 것도 좋을 것 같고.
그런 거 배워두면 모임에서 꿀리지 않고 좋을 거야.^^

후애(厚愛) 2020-01-21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정말 좋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따뜻한 오후 시간 되세요.^^

stella.K 2020-01-21 16:55   좋아요 0 | URL
아유, 뭘요...책이 정말 좋죠.
고맙습니다.
후애님도 좋은 시간 되시길.^^

2020-01-21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0-01-21 18:08   좋아요 0 | URL
ㅎㅎ 맞아요. 저도 그래요.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 시큰둥 했던 사람이
비틀즈를 능가한다던 BTS가 뭘하든 그런가 보다 하죠.
책에 소개된 곡들을 보면서 저도 유튜브로 찾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음반 사 모으는 시대가 아니라는 게 좀 섭섭하긴 해요.^^

2020-01-22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22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22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22 1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23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23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0-01-24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tella.k님 즐거운 명절연휴 보내시고
새해복많이받으세요.

stella.K 2020-01-24 15:55   좋아요 1 | URL
앗, 서니님, 고맙습니다.
서니님도 복된 설 보내시고,
새해 복 듬북듬북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