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맷 브라운

출연: 데브 파텔, 제레미 아이언스(2016년 영국)

 

 

언제부턴가 영화를 보면 그 영화가 원작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더구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전기 영화는 더 하지 않는가? 이 영화는 인도에 실존했던 천재적 수학자 라마누잔의 짧은 생애를 극화했다. 그래서 원작이 있나 찾아 봤더니 그의 평전 또는 전기 소설 같은 건 없고 어린이 위인 전기 같은 것이 발견됐을 뿐이다.

 

물론 우리나라에 없다는 것 뿐이지 영국에서 제작이 됐고 실제로 라마누잔이 영국에 유학한 적이 있는데다, 감독이 (국적이 정확히 어떤지 모르겠지만)인도 사람 같다. 그렇다면 백퍼 원작을 바탕으로 했을 것이다. 어쩌자고 우리나라엔 그의 전기가 없는 것일까?  

 

 

 

 

수학을 한 번도 잘 해 본적도, 그렇다고 좋아해 보려고 노력해 본 적도 없기 때문에 솔직히 이 영화가 나로선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긴 수학보단 천재란 수식어가 더 당황스럽다. 한번도 천재가 되본 적이 없으니. 이 영화에 수학을 다루건, 물리학이나 문학을 다루건 무엇이 그리 차이가 있겠는가? 영화는 그저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뿐인데. 단지 부러운 것이 있다면 이들이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발견하고 그것에 놀라워하고 그러는 것들이 부럽다.

 

더구나 라마누잔이 유학했던 곳은 지성의 요람이라던 트리니티다. 거긴 뉴턴을 비롯한 그야말로 내로라는 지성이 거쳐갔다. 그런 곳의 교수들이고 학생들이니(1920년대의) 그들의 콧대가 얼마나 높을까? 뭐 어느 나라나 인종 차별은 존재하는 법. 영화는 인구만 많지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나라의 남자를 처음부터 환대했을 리 없다. 그리고 영화는 웬지 영국을 끝까지 옹호할 참인지 그러한 차별에 대해선 아주 노골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견 이들의 차별이 이해가 간다. 얼마나 콧대가 높으랴? 그만한 지성을 길러낸 대학이고 나라니 말이다. 그게 우리 나라라면 더 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아무리 개천에서 용이나지 않는다지만, 미래는 꿈 꾸는 자의 것이란 건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인도가 계급주의 사회라지만 어느 계급은 배를 타면 안되는 계급도 있다니 놀랍다. 물론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고, 인도도 지금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또한 그런 계급주의 사회가 얼마나 사회를 억압하고 발전을 저해 하는지를 영화는 라마누잔을 통해 그것을 보여준다. 라마누잔이 자신의 계급이나 신분에 비관했다면 그는 한 발자국도 자신의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꿈만 바라보고 나가는 자세는 꽤 유용하고 필요한 자세다.

 

영화를 보면서 대학이 부럽긴 했다. 나는 거의 평생을 학교를 좋아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명문대의 뜰을 밟아보지 않은 것에 대해 그닥 부러워해 본적은 없다. 하지만 역시 대학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지적 욕구와 함께 뭔가 모를 내 안에 아쉬움을 자극시킨다. 

 

나름 볼만한 영화였다. 영화긴 하지만 내가 몰랐던 또 하나의 천재를 만났다. 천재가 남다른 건 남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을 갖는 것에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제목이 그런가 보다 싶다. 천재는 되지 않아도 좋다. 이 경이로움만 가질 수만 있어도 세상 살아가는데 훨씬 용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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