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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가 ‘여성과 소설‘이란 주제를 다루는 전략도 비슷하다. 『자기만의 방』은 ‘여성과 소설‘이라는 주제를 다루기도 하지만, 동시에 ‘여성과 소설‘이란 주제에 대해 에세이를 쓰는 과정에 대한 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일종의 메타담론, 글쓰기에 대한 글이다. - P58
과정에 대한 글. 자기만의 방 이 많은 사람들에게 타자화된 여성에 대한 의미있는 메시지, 각성에 이르게 하는 이유는 과정에 대한 글이기 때문이다. 과정은 어쩌면 결과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과정이, 방향이 원하는 목적을 향해 있다면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저절로 주어지는 결과란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싸한 결과, 과시할만한 결과에 몰두하는 이유는 타인의 시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결과에 과몰입하다보면 과정은 쉽게 무시된다. 내것이 아닌 결과를 성취한 뒤에 쉽게 공허해지고 길을 잃는 이유다. 스스로에게 진실될 때, 과정에 충실할 때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회복되어질 수 있다. 그건 필연이다.
우린 사람들에게 쓸 준비를 갖춰주지 않고, 그냥 "당신도 쓸 수 있어요!" 아니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냥 앉아서 써봐요!" 라고 하고 있어요. 하지만 뭔가를 만들려면, 만들 도구를 갖춰야해요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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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글로리를 봤다. 8회분 짜리 한시즌이었고 본격적인 복수는 3월쯤 시즌2에서 보여줄 모양이다. 이틀에 걸쳐 몰아볼만큼 기존 드라마의 진부함을 깨려 나름 애쓴 흔적이 돋보였다. 소설 속 문장처럼 여운이 느껴지는 대사들도 인상깊었다. 하지만 다 보고 난 뒤 전체적인 느낌은 조금 허탈하다. 악을 위해 태어난듯 미소를 지으며 친구들을 시켜 문동은을 괴롭히는 박연진. 고데기로 살을 여기저기 지지는데도 저항하지 못하고 양호실에서 약국에서 소독약을 찾는 문동은. 가해 학생들이 재력가 집안이라는 이유로 폭력을 두둔하는 선생님. 괴롭힘이 지속되고 엄마마저 합의금을 받고 사라지자 견디다 못해 옥상에 올라가 자살하려던 동은은 혼자만 죽을 수 없다며 복수를 다짐한다. 마치 히어로즈 물처럼 그렇게 주인공이 각성한다. 닥치는대로 일을 하고 돈을 모으고 검정고시를 치러 대학까지 마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된다.
꿈이 현모양처라던 가해자 리더 박연진이 두려워 할 수 있는건 자기 아이의 담임일테니까. 하지만 어딘가 억지스럽다. 드라마의 호흡상 어쩔 수 없었겠지만 주인공 동은은 너무 순식간에 각성한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십수년동안 칼을 가는 것보다 흔한 일은 십수년 동안 트라우마로 시달리는 거 아닌가?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나? 그러다 뒤늦게 신고하거나 또는 폭로해서(상대가 유명인일 경우)'사회적 살인'이라도 하는 경우는 더러 뉴스에도 나온다. 그것마저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다. 지지해주는 친구들이나 가족이 있어야 뭔가를 감행해볼 용기를 얻는다. 내가 아쉬운건 문동은에게 '과정'이 너무 약하다는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가해자들의 폭력만 너무 디테일하다.
생뚱맞은 조력자- 불편한거 하나 더 추가. 로맨스가 좀 안나왔음 어땠을까 싶었는데(아직은 로맨스도 아니고 조력자일뿐이다) 시청률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병원장 아들이라니 헛웃음이 나왔더랬다. 동은과 잦은 우연적 만남에 손발이 다 오그라들었다. 그에게도 나름 사연이 있는데 그래서 일까? 서랍에 왠 칼이 그렇게 종류별로 많던지(수술용 말고 우측 끝에)이 떡밥을 시즌2에서 작가님이 어찌 회수하실지. 갈수록 드라마 보고나면 바보가 되는것 같다. 이 조력자가 성형외과를 개원하는것도 결말을 위한 너무 뻔한 장치.
문동은도 '사회적 살인'을 원한다. 큰 그림을 위해 바둑도 배우고 나름 치밀하게 가해자들에게 미행을 붙여 완벽한 복수를 꿈꾼다. 철저히 혼자였던 동은의 이 복수의 스케일이 꽤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문동은이 복수에 성공하기를 바란다. 비록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이라도 궁지에 몰린 주인공이 복수하는 모습을 보는건 언제나 짜릿하다. 존윅이 그랬고 킬빌이 그랬고 말죽거리 잔혹사가 그랬다. ㅡ헐리웃 액션 느와르라 허투루 만든 것 같아도 존윅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과 그녀의 믿음이라는 과정이 있다. 킬빌에는 2세를 위해 새 인생을 살아보고자 했다가 임신상태에서 총알받이가 되었다는 과정이 있다. 말죽거리 잔혹사에도 학폭에 치이고 권위에 치이고 사랑에 차였다는 과정이 있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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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학폭을 다룬 또 하나의 드라마 시리즈 약한 영웅 class1. 상위1% 연시은은 새로 전학온 학교에서 첫날부터 괴롭힘을 당하지만 참고 또 참는다. 왜냐하면 엄마아빠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좋은 대학에 가려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인강 스타) 그런데 시은이가 공부에 진심이란 걸 알게된 일진들이 잠이 오는 마약성 진통제 패치를 시험중이던 시은의 목 뒤에 몰래 붙인다. 답안 확인과정에서 시험을 망친 사실을 알게된 시은은 뚜껑이 열려버리고...이 드라마도 재밌긴한데 폭력이 너무 과하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학교폭력에 마음이 무너지고 있는 아이들은 이런 드라마들을 보며 어떤 생각들을 할까?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폭력이 이렇게 또 소비되는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이걸 또 굳이 보면서 편하게 못즐기고 굳이 끼적이는 내 성격도 아이러니고...
19호실로 가다 에서 수전에게는 이 '과정'이 있다. 그녀는 서서히 변해간다. 남편과 동일하게 사회의 일원이었던 그녀는 아이들을 낳고 집안에 있게 되면서 점차 자신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희미해져가고 있다는 생각에 몰두한다. 십수년을 자신을 잃고 아이들을 위해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꼭대기 구석진 방에 자신만의 공간을 마련해 보려 하지만 타인에게서 독립된 동시에 고립되어짐을 실감한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를 방해할 수 없는 호텔에 있는 방을 하나 빌려 오롯이 혼자인 시간을 갖는다.
호텔 방은 평범한 익명의 장소였다. 수전이 원하는 바로 그런곳. 수전은 가스히터에 1실링을 넣어 작동시킨 뒤, 더러운 창문을 등진 더러운 안락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녀는 혼자였다.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혼자였다. 자신을 짓누르던 압박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도로의 자동차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리더니 곧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 P.304